역경 승화한 예술… 부울경 전 세대 남도 민요 울리다
정자경 (사)소리국악합창단 대표
국립남도국악원 단원 출신
민간 국악합창단 창단으로
부울경 최초 남도 소리 전파
부산 가야금병창 연주자 최초
경주전국국악대제전 대통령상
지역 국악계 '얼굴'로 자리매김

지난달 29일 부산시 부산진구 동천동 한 상가건물 3층의 (사)소리국악합창단 연습실. 가야금 줄을 곱게 매만지던 정자경(鄭慈景·45) (사)소리국악합창단 대표의 손끝에서 긴장과 설렘이 묻어났다. 지난 30여 년간 가야금병창 연주자로 무대를 누볐고, 목소리를 잠시 잃고서는 기획자, 교육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합창단 대표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오롯이 국악과 함께였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 뒤에는 목소리를 잃을 위기와 끝없는 생활의 고단함이 숨어 있다.
가야금과의 첫 만남, 가야금병창의 길로
정 대표가 국악과 처음 만난 것은 14살 중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대금을 구입하려던 아버지와 함께 찾아간 악기점에서 우연히 가야금을 마주한 것이 시작이었다.

가야금병창은 가야금을 연주하며 동시에 소리를 내는 고난도의 장르다. 어린 시절 그는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하며 국악에 몰두했다. 가야금병창을 배운 지 몇 달 되지 않아 광주 호남예술제에 출전, 은상을 수상해 재능을 뽐냈다. 예인 재능이 있다며 국악을 시키라는 할머니의 말에도 반대하던 아버지가 덜컥 딸이 상을 받자, 응원으로 태도를 바꿨다. 그래도 예술고등학교에 보내지 않고 공부를 해야 한다며 인문계 고교로 보냈다. 개인 레슨으로 가야금병창을 익히다 대학 국악과로 진학해 가야금병창을 전공했다.
예고 출신 학우들과 경쟁하며 열심히 하던 그 노력은 전국 대회에서 결실을 봤다. 제26회 전국탄금대가야금경연대회(2002년)에서 일반부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데 이어,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본격적인 국악인의 길을 걸었다. 전남대 총장에게 국악 부문 공로상도 받았다. "특별한 재능보다 포기하지 않고 매일 연습하는 성실함이 저를 이끌어 줬다고 생각한다. 하루도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국립남도국악원에서의 15년, 그리고 목소리

지난 2020년 6월과 11월 갑상샘암 진단과 수술에 앞서 2012년, 어느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슬럼프를 겪었다. 무대에 서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성대는 정 대표를 괴롭혔다. 소리가 나오지 않자, 같은 해 3월 국립남도국악원 장악과 기획단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연 기획에 새롭게 도전했다. 무대 뒤에서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또 다른 배움의 과정이 됐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개인 독주회와 전남대 국악과 겸임교수, 조선대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겸임교수, 남부대학교 음악학부 시간 강사, 전남예술고 국악과 시간강사로서 후학 양성을 꾸준히 이어갔다.
수술 집도의가 대학 국악 동아리 선배로 목소리를 살려내는 시술을 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긴 회복 과정은 그를 무대에서 멀어지게 했다. 재활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일부를 들어내면서 생긴 성대의 공간을 호흡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데, 힘을 잡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수술 후 5년이 지나 별 이상이 없어 완치됐다. 대개 국악하면 걸걸한 소리를 상상하지만, 의외로 정 대표의 목소리는 청아하다.
부산 정착, 부울경 유일 남도 민요 전수 합창단 창단

"이젠 부산에서 뿌리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남도 소리를 이곳 부울경에 알리고 싶었다"는 그는 부산에서 공연 기획과 연주, 부산MBC 라디오 자갈치아지매 출연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중 오랜 구상 끝에 지난 5월, 부산에서 (사)소리국악합창단을 창단했다. "부산은 국악 저변이 넓지만, 남도 소리에 대한 기반은 약하다. 그 빈자리를 메우고 싶었다."
합창단 구성원 15명은 대부분 비전공자 어르신(남자 2명, 여자 13명)이다. 하지만 국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전문가 못지않다. "합창단은 단순히 배우는 걸 넘어 무대에 서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서로 소리를 맞추고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 가장 큰 힘이 된다."
창단 이후 그의 활동과 성과는 눈부셨다. 지난달 14일 제43회 경주전국국악대제전에서는 종합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부산에서 가야금병창 부문 대통령상을 받은 이는 정 대표가 최초다. 다양한 봉사활동과 재능 기부, 대통령상 수상 등의 공로로 부산시장 표창장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부산 국악계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정 대표는 부산 시민들과 더 가까워졌다. 지난해 6월 26일 사직야구장에서 애국가 제창으로 존재를 각인시키고 △부산마루국제음악제 앙상블 콘서트 △영화의전당 한밤의 유U:콘서트 △해운대포럼 인문학 축제공연, 15분도시 부산 공감 콘서트 축하공연 '도모헌' △부산메디클럽 송년의 밤 '우리소리 강연' △미토시 민간교류단의 사상구청 방문 축하공연 △효콘서트(영화의전당) △원먼스 페스티벌 '정자경 명창의 아리랑 여행' 등 각종 공연을 기획하고 출연하며 그의 가야금병창 연주가 부산 곳곳에 울려 퍼졌다.
지난달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평화음악회 공연에 참여해 일본 무대에서도 남도 소리를 선보였다. "국악은 전문가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나 즐기고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이다. 저는 그 다리를 놓고 싶다."
현재 그는 동래 유락여중 가야금부에서 재능 기부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청소년에게 국악을 자연스럽게 체험할 기회를 주고, 소리국악합창단과 함께 지역 봉사 공연도 이어가고 있다. 유락여중은 올 연말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국악은 나누고 퍼뜨려야 빛난다." 정 대표의 이야기는 단순히 음악 활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갑상샘암을 극복한 뒤 대통령상, 부산시장 표창을 연이어 수상했다. "잃었던 목소리를 되찾고, 그걸로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내 삶이 국악과 다시 이어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악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고 강조한다. "국악은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도의 소리, 큰 목소리의 힘은 누구에게나 와닿을 수 있다. 그래서 합창이라는 형식을 택했다"는 정 대표는 개인적인 꿈도 털어놓았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심청가 무대를 꾸미고 싶다. 아버지가 심 봉사가 되고 제가 심청이가 돼 노래하며 그동안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
그의 국악 인생은 단순한 예술 활동을 넘어 가족의 이야기, 삶의 투쟁과도 맞닿아 있다. 목소리를 잃을 뻔한 절망에서 다시 일어선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소리극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부울경 곳곳에서 국악을 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특히 청소년과 시민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국악이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게 하고 싶다. 합창단이 그 다리 역할을 할 것이다."
"375만 부산 시민 모두에게 제 가야금병창을 들려드리고 싶다. 어린이, 청년, 어르신 할 것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국악이다. 더 나아가 해외에도 우리 소리를 알리고 싶다." 오는 12월 소리국악합창단의 첫 정기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는 이 무대를 기점으로 소리국악합창단을 부산·울산·경남을 대표하는 남도 민요 합창단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제 목소리가 돌아온 건 기적과도 같다. 이제 그 목소리로 남도 소리를 알리고, 부울경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국악인의 발자취를 넘어선다. 목소리를 잃을 뻔한 시련을 예술로 극복하고, 다시 시민과 나누며 국악의 길을 개척해 가는 과정은 '국악 알리기 여전사'라는 별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국악을 향한 뚝심과 삶의 역경을 예술로 승화시킨 정자경 대표. 부울경 유일 남도 소리를 연주하고 전수하는 그와 그의 소리국악합창단이 앞으로 만들어갈 무대가 부산·울산·경남의 새로운 문화적 울림, 그 울림이 국악의 씨앗이 되길 기대한다.
정자경 (사)소리국악합창단 대표 프로필
* 학력
1999 전남대학교 국악과 입학
2003 전남대학교 국악과 졸업
2006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악과 졸업
2010 조선대학교 교육학과 졸업(교육학박사)
2007 국가무형유산 가야금산조 및 병창 이수
* 수상 경력
2002 제26회 전국탄금대가야금경연대회 일반부 대상 (국무총리상)
2025 제23회 전국승달국악대제전 부분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2025 제43회 경주전국국악대대전 종합대상 (대통령상)
2025 부산광역시장 표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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