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를 함께한 매콤한 맛, 론 와인

천호성 기자 2025. 10. 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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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의 천병까기]
북부 론 포도원의 일몰. 아르데슈 에르미타주 관광청 운영 누리집 valleedurhonenord.com

올 봄 프랑스 론 계곡(Vallée du Rhône) 지역을 대표하는 두 마을의 와인을 한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론은 프랑스 동부 내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론강을 따라 200km 이상 펼쳐진 와인 산지다.

아비뇽 인근 샤토뇌프 뒤 파프(Châteauneuf-du-Pape) 마을로 대표되는 남부 론은 그르나슈·시라·무르베드르 블렌딩(배합)을 중심으로 과실향 짙은 레드와인을 만든다. 코트 로티(Côte-Rôtie), 에르미타쥬(Hermitage) 등 북부 론은 세계 최고의 시라(Shyrah) 생산지로 꼽힌다. 레드보다 생산량은 적지만 마르산느·비오니에 등의 품종을 쓴 향기로운 화이트 와인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선 유독 구대륙의 다른 유명 산지에 비해 론 와인을 만나기가 힘들다. 대형 마트나 전문 소매점에서 프랑스 와인의 십중팔구는 보르도·부르고뉴일 것이다. 국내 유통사들의 ‘고급화’ 마케팅 대상이 이들 지역에 치우친 탓이 크리라. 고가 론 와인 대다수가 빈티지로부터 최소 10여년은 묵혀야 제맛을 내는 ‘장기 숙성형’이라는 점도 진입장벽을 높인다.

지난 4월 시음한 도멘 피에르 위세글리오(Domaine Pierre Usseglio) 샤토뇌프 뒤 파프 2010 빈티지(왼쪽 세번째)와 도멘 장-루이 샤브(Domaine Jean-Louis Chave) 에르미타주 2012 빈티지(왼쪽 네번째). 천호성 기자

화려한 남부 론, 야성적인 북부 론

그래서 술자리에서 론 와인을 마주하면 더욱 반갑다. 이날 마신 ‘도멘 피에르 위세글리오(Domaine Pierre Usseglio) 샤토뇌프 뒤 파프’ 2010 빈티지와 ‘도멘 장-루이 샤브(Domaine Jean-Louis Chave) 에르미타주’ 2012 빈티지는 각각 남·북부 론의 매력을 교과서적으로 뽐낸 와인들이었다.

먼저 맛본 피에르 위세글리오 샤토뇌프 뒤 파프는 향과 맛이 묵직한 와인이었다. 첫 잔부터 검은 자두와 무화과 같은 달콤한 과실향을 밀도 있게 피웠고, 삼나무·버섯·구운 고기류의 숙성향들이 뒤이었다. 프랑스 와인에서 종종 스치는 풀내음은 여기선 풋내라기보다는 으깬 바질, 민트 등 맵싹한 스파이스(향신료)로 다가왔다.

입속에서는 말린 자두와 대추야자 같은 농축된 과실미가 반겼다. 수확된지 15년이 지났지만 무더운 남프랑스의 열감이 와인에 그대로 담긴 듯했다. 15.5도에 이르는 높은 알콜에도 산미가 뒤를 받쳐 밸런스를 잡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북부 론인 장-루이 샤브 에르미타주의 첫인상은 이보다 훨씬 어두웠다. 블랙베리·블랙커런트(카시스)를 앞세운 검은과실향이 달콤함을 쏙 뺀 채 등장했고, 흑연·철분향이 매콤하게 잔을 채웠다. 분재원에 들어온 듯한 이끼내음과 고가구를 떠올리게 하는 나무 냄새는 고풍스러웠다. 대체로 ‘검은색’이 연상되는 향이 많아, 검정 벽을 마주한 채 술을 마시는 기분일 정도였다.

와인은 혀에 닿고서야 표정을 풀었다. 강한 철분향은 여전했으되, 블랙베리를 입안 가득 씹는 듯한 과실미와 산미가 입을 즐겁게했다. 앞서의 과실들과 가구·가죽내를 중심으로 피니시(잔향)는 길게 이어졌다.

와인을 서빙해준 소믈리에는 와인이 가진 잠재력에 비해 “아직 어리다”고 했다. 아마 십수년 뒤일지 모를 ‘시음 적기’엔 향의 크기와 다채로움이 달라진다고 했다. 보틀을 준비한 나의 와인 스승은 남·북 론 와인의 차이를 이렇게 풀었다. “샤토뇌프 뒤 파프가 화려하게 화장한 사람이라면, 북부 론은 소떼를 헤치며 등장하는 야성적인 목동 같은 술이다.”

와인을 탐구하는 제자는 ‘고수’들의 코멘트를 머리에 담아두려 애쓰며 와인의 깊은 맛에 감탄했다.

2019년 6월 시음한 레 오트 바키에르 바케라스 그랑드 세르 2013 빈티지(맨 오른쪽). 천호성 기자

와인으로 다시 꺼낸 6년 전의 추억

그런데 불현듯 생각은 눈앞의 귀한 와인에서 수년 전 마셨던 비교적 ‘흔한’ 론 와인으로 흘러갔다. 기자 일을 잠시 그만두고 프랑스문학 대학원에 다니던 2019년 여름, 종강을 기념해 학교 친구들과 와인을 딴 날이었다. 대학원생의 얇은 주머니 사정에 5만원 넘는 와인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면서도 알코올 도수가 높고 향이 강렬해 ‘쉽게 취할’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게 남부 론 ‘바케라스’(Vacqueyras) 마을 와인이었다.

‘레 오트 바키에르 바케라스 그랑드 세르’라는 이름의 2013 빈티지 와인은 유난히 ‘매운’ 술이었다. 블랙베리·블루베리 향이 잠깐 나는 듯 하더니 후추를 코앞에서 가는 듯 매운내가 작렬했다. 낮지 않은 당도에 산미도 섭섭지 않았다. 다만 코에서부터 후미까지 이어지는 백후추 내음이 다른 향들을 덮었다. 이전에 경험 못해본 ‘특이한’ 와인이란 시음평이 남았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 이 술을 되짚어보니, 향과 맛보다도 기억에 선명한 건 와인을 먹으며 동료들과 나눈 대화였다. 20대 대학원생들은 종강을 하고도 자기가 전공한 작가들에 대해 떠들며 밤을 새웠다. 나는 알베르 카뮈의 희곡을, 한 친구는 현대어로 번역하던 중세문학 작품을, 다른 친구는 20세기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자전적 소설을 해석하며 부딪친 어려움을 나눴다.

그때는 고민 섞인 대화였겠지만, 다시 직장인이 돼 돌아보니 학업에 골똘하던 20대 후반이 그리웠다. 미래 걱정 없이 좋아하는 것을 좇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떠올리며, 지난 봄의 나는 두잔의 론 와인을 비웠다.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한동안 잊었던 기억을 불식간에 되살려준 건 론 와인을 관통하는 ‘매콤함’이었다. 위의 세 와인은 생산된 마을도, 생산자도, 가격대도 다르지만 시라가 들어간 론 와인 특유의 향신료나 흑연향을 모두 품고 있었다. 이 매운내음이 연결 고리가 되어 6년 전의 저녁을 떠올렸고, 추억은 거기에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대화로 넓어졌다. 내가 론 와인을 비교적 드물게 마셔 이런 연상은 더욱 도드라졌으리라.

와인 팬이 와인을 추억하는 이런 방식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날 마들렌 과자가 적셔진 홍차를 맛보고는, 일요일 아침마다 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든다. 빵집 진열장 속에서 보던 마들렌은 어른이 된 그에게 아무 느낌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떠받치고 있”었다. 어느날 우연히 그 맛을 다시 보면 기억 속의 등장인물과 사물, 배경이 단단한 형태를 갖추어 다가온다고 프루스트는 썼다.

그러니 향과 맛이 풍성한 와인은 수많은 기억을 길어올리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좋은 와인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다면 금상첨화다. 언젠가 닮은 와인을 만나, 그날의 추억이 머릿속 영상으로 다시 상연될 때의 놀라움과 설렘. 와인 마시는 사람만의 특권일 것이다.

천호성의 천병까기는

먹고 마시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쯤 눈독 들였을 ‘와인’의 세계. 7년 간 1000병 넘는 와인을 연 천호성 기자가 와인의 매력을 풀어낸다. 품종·산지 같은 기초 지식부터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길 비기까지, 매번 한 병의 시음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독자를 와인 세계에 푹 빠트리는 게 연재의 최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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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의 천병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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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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