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원 비호’ 보도자료 나오기까지…인권위 국·과장은 거부 못 했나요?

고경태 기자 2025. 10. 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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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지난 8월21일 열린 인권위 상임위원회에서 이숙진 상임위원(오른쪽) 뒤로 국장들이 앉아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최소 과장급 정도 되면 부당한 지시는 거부할 수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지난 1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내부망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이날 여러 명의 인권위 직원들은 자유게시판에서 “화가 난다”, “쓰레기”, “본색” 등의 격한 단어를 쓰며 사무총장과 국·과장 등 사무처 간부들을 향해 날을 세웠다. 이들이 문제 삼은 것은 전날 인권위 홍보협력과를 통해 공식 배포된 보도자료였다.

인권위는 전날 보도자료를 내어 “김용원 군인권보호관 겸 상임위원이 10월7일부터 9일까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 예정인 제17차 군옴부즈 국제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최종 결정하고 주최 측에 통보했다”며 “알 수 없는 사유로 출국금지 조처가 내려져서 불가피하게 불참을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인권위법과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파리원칙) 등 국제규범에서는 인권위와 인권위원의 업무수행에 있어 독립성이 침해받지 않아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고도 했다.

“알 수 없는 사유”라는 해명은 사실에 어긋난다. 김용원 위원은 군인권보호관으로서 박정훈 대령 긴급구제 기각 관련 외압 의혹으로 채상병 특검 수사대상이 돼 법무부로부터 출국 금지됐다. 김 위원이 인권위의 독립성 훼손과 관련된 채상병 사건 외압 의혹 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외려 “인권위 독립성”을 언급한 것도 적반하장에 가깝다. 그런데도 보도자료는 김용원 위원 개인 명의가 아닌 인권위 공식 창구인 홍보협력과 전자우편을 통해 기자들에게 배포됐다.

이석준 인권위 사무총장. 인권위 제공

일주일 전인 지난달 24일에도 국·과장 간부들이 자유게시판에서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윤석열 방어권 안건’의 전원위원회 상정 절차 결재와 관련해 이석준 사무총장과 서수정 침해조사국장 등의 책임론이 소환됐기 때문이다. 이들이 안건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신속하게 결재를 완료한 것이 문제가 됐다. 뒤이어 김용원 위원을 비호하는 내용의 인권위 공식 보도자료까지 전해지자, 사무처 간부들이 부당한 지시에 일말의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는다는 내부 비판이 한층 거세졌다.

직원 ㄱ씨는 이석준 사무총장의 책임을 따졌다. “그동안 사무총장이 한 일이라곤 ‘모르쇠’…속 타는 건 실무진뿐. 이 지점이 정말 화가 나는 것임. 외부에서 온 사무총장도 아니고 최소 30년(인권위 근무는 23년)은 위원회에서 일했을 텐데 마지막 이런 모습이라니.” 직원 ㄴ씨는 “특검 수사대상이 돼 출국금지 된 것을 마치 위원회 독립성을 침해받은 것처럼 호도된 내용으로 보도자료를 내다니요. 상임위원실이야 그렇다 치고 홍보협력과장 답변 좀 듣고 싶다”고 했다. ㄷ씨도 “왜 위원회가 이런 쓰레기 같은 공식 보도자료를 내야 되는 겁니까?”라며 힐책했다. ㄹ씨는 인권위 간부들을 향해 “저마다 다들 본색을 드러내고 그래서 이득을 얻고, 이렇게 조금씩 조직이 망가지는 것 같다”고 썼다.

인권위는 지금 중대한 위기에 처해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석열 방어권 안건에 찬성한 위원장과 위원이 다수파를 점하고 최종결정권을 행사하는 게 위기의 한 축이라면, 일부 국·과장들이 그들의 손발이 되어 실무를 떠받치고 있다는 게 또 한 축이다. 공무원 조직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중간 관리자와 고위급 간부들의 운신 폭이 넓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인권위 내부에서는 간부들의 침묵과 방관이 너무 길고 치명적이라 여긴다.

간부들의 이런 태도는 한겨레가 지난달 17일부터 22일까지 국장급 이상(고위공무원 가·나급) 7명과 과장급(3·4급) 34명(팀장, 파견 및 연수 포함) 등 총 41명을 대상으로 벌인 ‘인권위 정상화를 위한 무기명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났다. 익명 설문(10개 문항)이었는데도 41명 중 8명만이 설문에 응해, 유효한 응답률을 얻지 못했다. 특히 국장급 이상 간부 7명은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간부들의 ‘눈치 보기’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응답한 8명은 모두 과장급으로, 설문 대상의 23.5%에 불과했다. 이들은 현 안창호 위원장 체제에 비판적인 간부들로 보인다. 가령 “‘윤 방어권 안건’의 전원위 상정에 대한 국·과장과 사무총장의 결재행위가 적절했냐”는 질문에 과장 8명은 모두 “일정 시간 문제제기와 항의를 해야 했다”는 답을 골랐다. 나머지 26명의 과장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한 인권위 직원은 한겨레에 “인권위의 관료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또 다른 직원은 “인권위가 인권 증진 및 보호를 위한 독립기구가 아니라 승진이나 자리 보전을 위한 기구로 변모 중”이라고 평가했다. 국가기관이라는 한계에도 인권에 관한 한 독립적이고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던 조직의 전통과 성격이 일부 간부들에 의해 약화·위축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간리(GANHRI,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 특별심사 결과가 나오는 10월은 안창호 위원장에게 운명의 달이다. 등급이 보류되거나 강등되면 위원장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 수도 있다. 김용원 상임위원 임기는 내년 2월에 끝난다. 현 위원 구도가 조만간 역전된다면, 인권위에 큰 변화가 올 것이다. ‘사무처의 대대적 인적 쇄신’은 그다음 과제로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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