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 사라지는 텅빈 달콤함, 파블로바

김지은 기자 2025. 10. 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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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오늘 잉크는 초콜릿
서울 지하철 서울대입구역 근처 옐로우버터드림의 파블로바. 디저트 외에도 다소 여러가지가 들어가있는 사진이지만, 카페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좋아서 선정해봤다. 파블로바도 매우 맛있다.

“기자님. 지금은 화가 나실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희 정도는 젠틀했다고 느끼시게 될 겁니다.”

기자로 일하며 가장 쉽지 않았던 시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첫 직장에서 기업을 출입하던 때를 꼽겠다. 옅게나마 사명감을 지녔다고 자부하며 언론에 막 발을 딛었는데, 내 소신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시간이다. 막연히 꿈꿔왔던 취재란 불의를 발굴하고 이를 활자화해 세상을 더 낫게 바꿔가는 것이었다면, 현실에서는 국내 유수 대기업의 회장 이름만 기사에 스치듯 언급해도 득달같은 홍보팀의 전화를 받는 신세였다. 회장님이 불편해하실 수 있으니 이름은 굳이 언급하지 말고 기사를 써 달라는 요구였다.

저널리즘이란 지금도 망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모든 게 정말 아리송하게 느껴졌다.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이 한없이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그 판단을 회사 선배에게, 혹은 더 위의 데스크에게, 가끔은 내게 요청을 빙자해 지시하는 기업 취재원에게 대신 맡겨버리기도 했다. 어버버 간신히 상황을 넘기고 나중에 생각하니 ‘그러지 말 걸’ 싶었던 경험도 숱했다.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깨닫는 것부터가 성장이라면, 미처 성장이 시작하기도 전 단계였다고 할까.

발화점이 된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출입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직접 현장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하는 ‘르포’ 취재를 할 때였다. 시장에서 경쟁이 붙은 두 대기업의 신제품 중 어느 쪽이 더 잘 팔리는지를 물어보기 위해 발품 팔아 여러 가게들을 돌아다녔다. 대체로 ㄱ회사의 제품 판매량이 우세했으나, 어떤 지점은 “두 회사의 제품이 비슷하게 팔린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직원의 멘트를 기사에 일부 집어넣은 게 생각지도 못한 화근이 됐다.

ㄱ회사는 기사가 출고된지 5분도 되지 않아 나를 포함해 같은 부서의 모든 선배,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슷하게 팔릴 리가 없다. 우리 제품이 압도적으로 잘 팔린다”는 항변에 “대체로 그렇다는 점이 기사에 들어갔고, 다만 예외도 반영한 것”이라고 반박하자 “그건 그 직원이 잘못 안 것이다. 그런 지점은 한 군데도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나오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기사를 수정해줄 때까지 ㄱ회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기사에서 해당 멘트가 빠졌을 때는 형용하기 힘든 좌절감이 들었다.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 토라비의 생과일파블로바. 정말 보기드물게 파블로바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맛을 제대로 구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력감은 내 성과물에 대한 주체성 상실 탓이기도 했지만, 관계에 대한 부분도 컸던 것 같다. 첫 출입처에 설레며 기업의 재무제표를 공부하고, 해당 산업에 대해 책을 읽고 스터디를 하고, 처음 사귀는 취재원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 무색했다. 어떤 합리적인 근거에 의한 설득이나, 공감할 만한 의사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채 결과물을 부정당하고 나니 그 이후에는 어떤 낯으로 ㄱ사의 사람들을 마주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정작 그들은 태연했다. 한동안 기분이 상한 내색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 초년생 기자에게 ㄱ회사의 차장은 “기자님이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래요. 나중에 중소기업도 출입하며 비교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깔끔한 대응을 하는지 알게 될 텐데”하며 알 듯 모를 듯한 훈시를 했다. 자신들은 정확한 규정과 기준에 따라 체계적으로 대처하는 편이라고. 이 정도면 기자와 취재원이 맺을 수 있는 관계들 중 제법 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라고 말이다.

그 후 얼마간 업무에 대한 의욕과 흥미가 떨어졌다. 모든 게 마치 머랭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외형을 지녔지만 입에 넣는 순간 묵직한 질감 없이 빠른 속도로 모두 녹아버리는. 속을 비워둔 게 아닌데도 왠지 그 안은 텅 비어있는 느낌을 주는 디저트, 머랭. 끈끈하거나 단단한 밀도를 기대하기 힘든, 거품기로 한껏 쳐서 만들어 낸 단 맛.

머랭 디저트의 최고봉은 단연 파블로바다. 뉴질랜드 출신의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예쁜 머랭 케이크. 개인적인 취향으로 굉장히 좋아하지만 자주 먹게되진 않는다. 파는 곳이 많지 않은 데다가, 높은 가격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진다. 혀에 닿으면 금세 사라지는 약간의 허무함을 동반하는 과자. 끈적한 꿀이나 빵 부스러기가 떨어질 일은 없어 깔끔하다는 장점은 있다. 생크림과 과일까지 곁들이면 더없이 화려한, 설탕과 계란만으로 만든 유리의 성. 함부로 입장하려 했다간 친절하고도 차가운 문지기들이 막아서는.

안양 범계역 근처 카페 데이도트의 파블로바. 체리가 얹혀있고 굉장히 귀엽지만 가격은 정말 귀엽지 않다. 하지만 비싼 값은 한다고 느껴지는 정도의 맛.

그때가 유독 허망한 경험이었고 기업 출입의 모든 시간들이 그렇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행위가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기자라는 직업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지는 오랫동안 오리무중이었다. 적당히 필요할 때 말을 섞고, 가끔은 웃으며 술자리도 하다가, 의견이 부딪히거나 비판 기사로 얼굴을 붉히는 시점에는 극히 사무적으로 잘 넘기기만 하면 프로 언론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인가. 쉽게 무너지는 달콤함에 기대어 원하는 기사를 써주기도 하고, 위험하진 않지만 내밀한 정보도 듣다보면 조금쯤 있어보이는 기사를 쓸 수 있었을까.

그 후 회사를 옮기고 또 많은 시간이 흘러 연차를 채운 지금에도 그들의 논리에 동의가 되진 않는다. 단순히 ‘비즈니스 관계’로 축약되지 않는 덩어리진 신뢰와, 깊은 이야기를 들으려는 무수한 노력들이 훨씬 나은 기사를 만든다고 믿으니까. 여유로움과 깔끔함은 어떤 인간관계에선 미덕이 될 순 있겠지만, 최선을 다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결국 아쉬움이 남지 않겠나. 가끔은 실망시키고, 그러다가 언성을 높이는 일이 생기더라도 일단 질척질척해져보는 게 더 좋겠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물론 업무적인 관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선 더욱 그렇다. 어릴 때 동경하던 ‘쿨’해서 멋있어보이는 어른은 포기한 지 오래다. 좀 못 볼 꼴을 보더라도, 끈끈하고 밀도 높은 최선을 다한 후에 하는 후회는 아쉬움보다는 덜 진할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려니 디저트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언급한 건 처음인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 것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위에 부담되는 디저트들에 지칠 때 한없이 가볍고 사치스러운 파블로바가 내겐 절실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종종 찾아다니며 먹을 계획이다. 머랭을 입 안에서 녹일 때마다 유치하지만 혼자 생각하겠지. 역시 그때 그 기사는 내가 틀린 게 아니었다고.

오늘 잉크는 초콜릿은?

술을 못 해서 디저트로 2차를 가는 것을 선호하는 김지은 기자가 늘어놓는 가벼운 수다 같은 에세이입니다. 팍팍한 일상에 지치셨나요? 김 기자가 풀어내는 달콤한 이야기를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https://www.hani.co.kr/arti/SERIES/3318?h=s)에서 만나보세요!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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