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 ‘더 일할 자유’ 보장해야 진짜 선진국
주40시간제에 다양한 예외 인정
韓 획일적 52시간 규제 안 풀면
글로벌 기술 경쟁서 미래 없어

10여 년 전 실리콘밸리 출장 때 한국과 미국의 근로 문화 차이를 실감했다. 미 반도체 업체 연구원으로 일하는 지인이 차를 몰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호텔에 체크인한 뒤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회사로 출근해야 해서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휴일 근무하면 수당은 얼마나 더 받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연봉제라서 휴일 근무 수당은 없다”는 것이다. “수당도 못 받는데 굳이 출근할 필요가 있나”라고 되물었더니, 그는 “일요일에 출근해 연구 중인 프로젝트를 진척시키지 않으면 그만큼 성과가 뒤처지고, 연말 연봉 협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인 성과를 위해 휴일에도 출근해 주당 70시간 넘게 일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1940년부터 공정근로기준법(FLSA)으로 주 40시간 근무제를 의무화한 나라다. 그런데 어떻게 70시간 근로가 가능할까. 답은 제도 자체가 경직되지 않고 융통성 있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미국 법은 40시간을 초과할 경우 1.5배 수당 지급을 의무화하지만, 한국의 52시간처럼 총 근로시간 한도는 없다. 직원이 원하면 수당을 더 받고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구조다.
한국과 근본적인 차이는 이 법이 모든 근로자에게 같은 잣대를 획일적으로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임금 근로자는 법의 보호를 받지만, 높은 보수를 받는 전문·관리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 업종 특성에 따라 매우 구체적이고 폭넓은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주는 일정 연봉 이상 사무직의 근로시간을 제한하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뿐 아니라, 대표 산업인 실리콘밸리의 IT 산업과 할리우드 영화 산업 종사자에게 40시간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창의적(creative) 직업 종사자’나 근무시간의 50% 이상을 사업장 밖에서 근무하는 영업 직원처럼 예외 규정도 디테일하다. 운송업과 보건업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든 업종에서 52시간 초과 근무 시 경영자가 처벌받는 한국에선 꿈도 못 꿀 일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한다’는 996 근무제가 확산하고 있다. AI·로봇·전기차 등 미래 산업에서 중국에 턱밑까지 추격당한 미국 기업들이 중국식 996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가 “세상을 바꾸려면 주 80시간 이상 일하라”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하루 12시간씩 6일 일하면 주 근로시간은 72시간이 된다. 52시간과 72시간의 차이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어떤 분야든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달성하는 데, 주당 52시간씩 일하면 192주가 걸린다. 3년 9개월쯤 된다. 반면 72시간씩 일하면 이 기간이 139주, 2년 8개월로 단축된다. 첨단 기술 경쟁은 밤낮 가리지 않고 24시간 진행되는데, 전문 인재 양성에 이 정도 격차가 벌어진다면 승자는 누가 되겠는가. 불 보듯 뻔하다.
역대 정부는 늘 ‘선진국 수준’을 한국의 목표로 내세워왔다. 이재명 대통령도 노란봉투법과 상법 개정안, 근로시간 단축 등 핵심 공약을 “선진국 수준으로 맞춰가겠다”며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선진 제도의 핵심은 획일적 규제가 아니라 합리적 차이를 존중하는 다양성에 있다.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면 인재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더 일하고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획일적 52시간 규제는 풀어야 한다. 근로자가 사회적 약자로 차별받는 것은 막되, ‘더 일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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