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 정조의 의도된 선택, 연호궁과 선희궁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매우 독특하면서도 의미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름하여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이다. 영조·정조·순조를 거쳐 대한제국까지, 후궁의 왕실 제사의 위상 변화를 재조명하는 최초의 전시여서 더욱 그렇다.
이번 기획전은 말그대로, 왕을 낳았으나 왕후가 되지 못한 일곱 후궁을 조명한다. 특히, 이들을 모신 사당을 '칠궁(七宮)'이라 하는데, 조선의 유교적 제례 질서 속에서 종묘에 들지 못한 후궁들을 위해 별도로 조성된 공간이다.
'칠궁'은 ▶인빈 김씨의 저경궁(원종) ▶희빈 장씨의 대빈궁(경종) ▶숙빈 최씨의 육상궁(영조) ▶정빈 이씨의 연호궁(진종) ▶영빈 이씨의 선희궁(장조) ▶유빈 박씨의 경우궁(순조) ▶황귀비 엄씨의 덕안궁(영친황)을 통칭한다. 원래는 각각 흩어져 있던 사당을 1908년 육상궁 경내로 통합하고, 1929년 덕안궁까지 옮기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일제강점기 무리한 합사와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축소된 칠궁을 넘어, 그 안에 깃든 후궁들의 삶과 역사적 층위를 복원하고자 했다"는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의 설명 만큼이나 특별한 이 전시의 면면을 도록을 중심으로 세심히 살펴보고자 한다. 연재는 총 5부로 구성된 전시의 흐름을 따른다. [편집자주]

임오화변으로 인한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영조는 세손인 정조를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았다. 이후 세손이 즉위하면 종통의 확립을 위해 효장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고, 왕의 생모인 정빈 이씨에게 궁원제를 적용하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임오화변 때 아들인 사도세자의 죄를 고변한 영빈 이씨에게는 나라를 지킨 공덕을 현양해 '의열(義烈)'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정빈과 같이 궁원제로 예우하라는 전교를 남겼다.

정조는 특히, 영조의 유교(遺敎)에 어긋나는 세 가지 선택을 감행하게 되는데, 첫째는 추숭왕의 사친인 정빈의 연호궁에 육상궁보다 격을 낮춘 의례를 시행한 것이고, 둘째는 세자의 사친인 영빈에게 궁원제를 시행하지 않고, '왕의 사친'만을 그 대상으로 삼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것이었다.

◇ 11월 16일, 모자(母子)의 기일(忌日)이 같아 더욱 애통해 하다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외아들 효장세자가 1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영조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7년 전인 1721년(경종 1) 같은 날 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가 요양차 장동의 사저 창의궁으로 나갔다가 당일 사망했음을 떠올리며 "마음에 더욱 애통한 일"이라고 슬퍼했다.
이는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된 지 약 40일 남짓한 시점이었으며, 그녀의 나이 고작 28세였다. 정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노론의 독살로 회자되기도 했지만, 영조는 '소훈이씨 제문'에서 "정빈이 궐 안으로 거처를 옮긴 후, 늘 스스로 두려워하여 갈수록 불편해하다가 종내는 고질이 되어 낫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며 자책했다.
정빈이 사망한 지 3일 뒤에 영조는 비통한 심정을 담은 제문을 짓고, 상궁을 대신 보내 제사를 올리게 했다. 그는 제문을 통해 '정빈은 어릴 적부터 친구와 같은 사이로, 온순한 성품과 법도있는 행실을 갖춘 인물'로 서술했다. 제문의 내용(빨간선 안쪽)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신축년 초하루의 간지가 무자(戊子)인 11월 19일 왕세제가 상궁 이씨를 보내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을 가지고 소훈 이씨의 영구(靈柩) 앞에 슬프게 제사를 지낸다. 오호라! 아프도다. 세상에 슬프고 쓰라린 아픔이 어찌 없겠냐마는, 내가 오늘날 만난 일 같은 것이 어찌 있으랴?
오호라! 그대는 온순한 성품과 부드럽고 바른 자질을 가지고 양가에서 태어나 이른 나이에 궁궐에 들어왔소. 그대가 선발되어 들어올 때 나 또한 나이가 어렸는데, 이미 어렸을 때부터 그대가 처신함에 있어 모두 규범과 법도가 있었으니 이것은 내가 넌지시 감탄했던 바라오.
그대가 나의 소실이 되어서는 조심조심하여 밤낮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며, 내게 과실이 있으면 그때마다 내 안색을 살피고서 충고했으니, 내가 늘 뉘우치고 고친 것이 어찌 애정에 이끌리어 그런 것이었겠는가? 그 선한 마음에 정말 감복하여 그런 것이라오. 명분은 비록 남여이지만 뜻으로는 벗이었으니, 내 마음을 아는 자가 그대이고 그대 마음을 아는 자가 나였소.
(아래)끝이구나! 이 삶이여. 비통하구나! 떠나감이여. 저승과 이승은 영원히 막혀 있어 소식도 통하기 어렵구려. 울음을 삼키며 애통해하자니 눈물은 흐르는 샘이 되었고, 슬픔을 머금고 제문을 짓자니 목이 메어 차마 짓지 못하겠소. 촛불 아래서 붓을 적시니 글자가 깔끔하지 못하오. 아! 통탄스럽도다.

영빈은 사도세자가 사망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영조는 후궁 상례의 원칙과 달리 궁궐 안에서 염습을 행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또한, 그녀의 '의열'을 표창하는『어제 표의록(御製 表義錄)』을 찬술, 이를 간행해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명했다.
"나라를 위해 후세에게 써서 보여준다"며 첫 문장을 시작한 영조는 "임오년 윤 5월 13일 아침에 눈물을 흘리며 내게 고한 일이 없었다면 나에게 오늘이 있겠는가"라며 나라를 위한 의리를 우선해 모자간의 은혜를 끊은 영빈의 공덕을 강조했다.
영조는 이미 영빈의 사당과 묘소를 궁과 원으로 정했으므로, 세손이 즉위하면 각종 의물(儀物)을 갖추고 수봉관(守奉官) 등의 차출도 정한대로 거행할 것을 명하고, 자신의 전교를 별도로 작성해 의궤(儀軌)의 예에 따라 예조에 보관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조는 상시책인의를 거행하지 않았고, 원의 위상에 맞는 정자각과 석물 등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후 의열궁과 의열묘는 궁원제에 미치지 못하는 경제적 위상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칠궁의 신주는 종묘의 신주와 달리 사대부의 신주 형태로 제작됐는데, 구체적인 제주의 형식은 매우 다양하다. 칠궁 신주의 제주 형식은 '시호+작호+성씨+신주'를 기본으로 하되, 궁의 성립 과정과 개제 여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특히, 영빈 이씨의 신주는 유일하게 '증시(贈諡)' 두 글자가 추가되고, '신주(神主)' 두 글자는 생략된 '증시의열영빈이씨'로 제주돼 있다. 이러한 영빈 신주의 특징은 어떻게 설명될까. 이는 영조가 종묘사직을 지킨 영빈의 공적을 공신과 동등하게 간주한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이번 기획전은 2026년 6월 26일(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15인 이상 단체관람의 경우 사전 신청을 통해 전시 안내를 진행한다. 문의 031-730-8820
강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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