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은중과 상연'이 꺼낸 화두... 조력사망, 금기를 넘어 논쟁의 중심으로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먼센스] "고통을 거절할 권리가 있지 않나요"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이 공개 직후 존엄사가 화제의 중심에 섰다. 30년 우정과 애증을 그린 이 작품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말기 암 환자의 '조력사망' 여정을 정면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극중 상연(박지현)은 오랜 친구 은중(김고은)에게 스위스 동행을 부탁하고, 은중은 망설임 끝에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적어도 나한테 고통을 거절할 권리는 있잖아?"라는 상연의 대사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배우 김고은은 최근 인터뷰에서 "정말로 소중한 누군가가 동행을 해달라고 하면 기꺼이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조력존엄사'는 더 이상 치료 가능성이 없고 극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가 의료진의 약물 처방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말한다. 환자 본인이 직접 약을 먹거나 주입 버튼을 누르는 방식으로, 의사가 약을 직접 투여하는 안락사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력존엄사와 안락사 모두 불법이다. 환자 결정으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만 2018년 합법화됐다. 반면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등은 조력존엄사를 허용한다.
드라마는 픽션이지만 현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말기 환자들이 마지막 선택지로 스위스행을 택하는 것이다.
2000만원 들고 스위스로 향하는 한국인들
2025년 현재까지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한 한국인은 10여 명으로 추정된다. 스위스 조력 사망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 페가소스, 라이프서클 등에 가입한 한국인 회원은 약 300명에 달한다. 2019년 107명이었던 것에 비해 3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국내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300만 명을 넘어섰다. 전체 성인인구의 7%에 육박하는 수치다. 하지만 사전연명의향서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만을 의미한다. 약물을 투여해 적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조력사망과는 다른 개념이다.

스위스가 조력사망의 목적지가 된 이유는 명확하다. 외국인에게도 조력사망을 허용하는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미국 10개주와 워싱턴 DC,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이 조력사망 합법 국가지만 외국인에게는 허용하지 않는다.
스위스 형법은 '이기적 동기'에 의한 자살방조만 처벌한다. 이타적 목적이라면 조력자살을 용인하는 셈이다. 특이한 점은 도움을 주는 자가 의사일 필요가 없고, 조력자살을 하는 이가 스위스 국적자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2011년 취리히주에서 조력자살 금지를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됐으나 80%의 반대로 부결됐다. 스위스 사회가 조력사망을 얼마나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스위스에서는 2018년부터 조력자살자 수가 일반 자살자 수를 앞질렀다. 스위스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조력자살자는 1,729명으로 일반 자살자 995명의 거의 2배에 달했다. 그해 전체 사망자 7만1822명 중 2.4%가 조력사망을 선택한 것이다.
존엄사망은 어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까. 최다혜 한국존엄사협회 회장은 "루게릭병으로 4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분, 말기 암 환자 등이 주로 협회 측으로 문의하신다"며 "올해 7월에도 스위스에서 조력사망을 택한 분이 있었다"고 전했다.
까다로운 절차, 2000만 원의 비용
스위스행 절차는 복잡하고 까다롭다. 우선 본인의 의료기록을 모두 제출해야 한다. 얼마나 아팠는지, 통증 정도는 어떤지 상세히 기록되어야 한다. 의료 기록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에세이를 작성해 평소 가치관과 현 상태가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 의료진의 심사를 거쳐야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의사결정 능력'이다. 최 회장은 "스위스에 가서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까지 의사결정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우울증 증상이 있으면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호텔과 항공료를 제외하고 약 2000만 원이 소요된다. 의사 상담 및 처방, 약값, 장례비 등이 포함된 금액이다. 예외적으로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경우 단체에서 비용을 감면해주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금전적 비용이 필요한 셈이다.
말기 환자에게 장시간 비행은 또 다른 고통이다. 최 회장은 "10시간 넘는 비행기 탑승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라며 "하반신 마비가 있는 경우 좁은 기내에서 화장실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은중과 상연> 속 조력사망 장면이 실제와 흡사했다고도 밝혔다. "드라마는 실제 디그니타스가 사용하는 호텔에서 촬영됐고, 과정 역시 꽤 사실적으로 묘사됐다"고 말했다.
마지막 고민은 '동행인'의 자살방조죄 인정 우려
가장 큰 고민은 동행인이다. 조력사망 비영리단체는 신원 확인을 위해 반드시 동행인의 서명을 요구한다. <은중과 상연>에서 은중이 상연을 따라 나선 이유다. 하지만 이것이 자살방조죄에 해당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가족조차 동행을 꺼린다.
최 회장은 "가족과 함께 가고 싶어 하시던 말기 암 환자분께 '동행하신 분이 한국에서 경찰 조사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며 "결국 그분은 동행을 포기하셨다"고 전했다.

형법 제252조 2항의 자살방조죄는 1년 이상의 징역형을 규정한다. 법조계에서는 조력사망 의사가 확고한 상황에서 단순히 옆을 지킨 것만으로 처벌받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하지만 자살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거나 비용을 지원하는 경우라면 자살방조죄가 성립될 수 있다. 법적 불확실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 스위스 조력사망에 동행했다가 기소된 사례는 없다. 경찰 조사를 받은 경우는 있었으나 검찰 단계에서 기소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법적 불확실성은 환자와 가족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고통이다.
국민 82% 찬성…하지만 법은 멈춰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성인 102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2%가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했다. 찬성 이유로는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불필요하다'(41.2%),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27.3%), '죽음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19.0%) 등이 꼽혔다.
'좋은 죽음'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신체적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 '가족이 오랫동안 병 수발을 하지 않는 것', '가족이 경제적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등이 꼽혔다.

최 회장은 "캐나다 통계를 보면 조력사망을 선택한 분들의 95%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받았거나 받을 수 있는 분들"이라며 "이미 사망 단계에 진입한 분들이 선택하는 의료적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법제화는 답보 상태다.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현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7월 발의한 '조력존엄사법' 제정안은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척수염으로 고통받는 이명식 씨와 그의 딸이 2023년 조력사망 미입법이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지만, 약물 처방을 통한 적극적 조력사망은 허용하지 않는다. 최 회장은 "법안이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며 "조력사망 대상을 어떤 질환으로 한정할 것인지 등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세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계는 어디까지 왔나…확산되는 조력사망 법제화
조력사망을 둘러싼 세계의 움직임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등은 이미 의사조력자살뿐 아니라 적극적 안락사까지 법제화했다. 룩셈부르크, 스페인도 안락사를 법제화했다.

캐나다는 2016년 '의료적 조력사망법'을 제정했고, 호주 일부 주도 제한적으로 조력사망을 허용했다. 미국은 1997년 오리건주가 처음 시행했고 현재 10개 주와 워싱턴DC가 관련 법을 운영한다.
최근에는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가톨릭 본산인 이탈리아도 토스카나주가 조력자살을 법제화했다.
"생명 존중이냐, 현대판 고려장이냐"
찬반 논쟁은 첨예하다. 찬성 측은 '돌봄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한다. 연명의료 중단,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이어 조력사망도 생애 말기의 선택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반대 측은 남용 가능성과 종교적 이유를 들어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존엄사협회는 11월 1일 '세계 죽을 권리의 날'에 국회 앞에서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법적 공백 속 떠나는 사람들. 한국의 현행 형법은 자살방조죄와 촉탁살인죄 모두 조력사망을 명확히 금지한다. 의사 역시 자살교사·방조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안규백 의원 법안이 자살방조죄 적용 배제를 규정했지만 촉탁살인죄는 여전히 적용 가능해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석배 단국대 교수는 "말기환자의 치료거부권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법제에서 의사조력자살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임종환자가 아니더라도 연명의료 거부권을 인정하는 환경 조성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이 촉발한 논의가 일회성 화제로 끝나지 않고, 진지한 사회적 대화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최다혜 회장은 "지금 우리 사회는 고통을 견디거나 참혹하게 죽는 것,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며 "의사 조력사망은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Copyright © 우먼센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