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가 입던 그 옷, 간단후쿠를 기억한다는 것

박수진 기자 2025. 10. 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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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위안부’ 몸으로 전쟁 참극 기입한 김숨 소설, ‘간단후쿠’

“간단후쿠에는 구멍이 네 개 있다. 둥그스름한 구멍들은 속이 텅 비어 있다. 가장 큰 구멍은 아래에 있다. 아래에 있어서 아래로 통하는 그 구멍은 내 고향집에서 2리쯤 떨어진 우물보다 깊고 크다.”

‘간단후쿠’는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입은 통으로 된 치마다. 김숨 작가는 소설 ‘간단후쿠’(민음사 펴냄) 작가의 말에 쓴 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만난 지 10년” 만에, “10년이라는 ‘징한’ 만남을 갖고서야 그분들 이야기를 마침내 소설”로 썼다.

‘간단후쿠’에는 작가가 만난 할머니들이 불러낸 소녀가 있다. 소녀들은 14살, 15살, 16살, 17살의 몸으로 전쟁의 한가운데, 중국 만주 위안소에 있었다. 소녀들은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되어 밤이 되면 군인들을 데리고 자고, 날마다 귀리죽을 먹어 낯빛도 간단후쿠의 빛도 귀리죽 빛깔을 띠어간다. “군인들을 데리고 자는 동안 내 몸은 간단후쿠 안에서 휘어지고, 뒤집히고, 눌리고, 부서지고, 쪼개진다. 어깨, 젖가슴, 배, 팔, 허리, 엉덩이, 다리가 간단후쿠 안에서 토막 난 물고기처럼 뒤죽박죽이 돼 어지럽게 허우적거린다.”

10년 동안 할머니의 말을 듣고 새긴 작가가 써낸 소설에는 “군인 콧물”(정액을 표현한 단어)이 들어찬 ‘삿쿠’(일본군이 쓰던 콘돔)를 강가에서 빠는 소녀들, 기차칸처럼 붙어 있는 열 개의 방 안에 들어가 매일 밤 덜컹대는 소녀들, 삿쿠를 쓰지 않는 군인들에게 “아리가토, 삿쿠를 껴요” “아리가토, 스미마센, 삿쿠를 껴요” 애원하는 소녀들, 뱀처럼 한 줄로 걸어가 위생 검사를 받는 소녀들, 임신해서 감자 자루처럼 배가 불러오고 아기를 낳고, 죽은 아기를 낳고, 산 아기를 ‘바늘장수’에게 머릿기름 한 병 받고 떠나보내는 소녀들, 아래에 아기가 있어도 계속 군인들을 데리고 자야 하는 소녀들…, 소녀들이 있다.

소녀들을 사온 민간 ‘위안소 운영업자’ 오토상은 소녀들에게 요코, 미치코, 나나코, 아유미, 사쿠라코 등 일본 이름을 준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소녀들은 군인에게 맞아 죽기도, 목매어 죽기도, 총알에 맞아 죽기도, 병들어 죽기도 한다.

미치코가 죽고 나나코가 죽으면 그들이 여기 있었다는 것은 누가 기억할까. 작가는 요코의 입을 빌려 쓴다.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간단후쿠를 기억하는 것이다.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군인 콧물 묻은 삿쿠와 군표를 기억하는 것이다. (…)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밤마다 군인들과 부르던 돌림노래를 기억하는 것이다.” 296쪽, 1만7천원.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21이 찜한 새 책

리와일딩 선언

김산하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2만5천원

‘리와일딩’(재야생화)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처음 소개하는 책이다. 혹 서울 거리에 대형 포식동물을 풀어놓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 리와일딩은 ‘반문명’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재조정하기 위한 과학적이고 사려 깊은 접근이다. 사람이 먼저 아닌가? 그래서다. 지은이는 토착민 등 모든 사회 구성원이 리와일딩 과정에서 어떻게 ‘평등한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가까스로-있음: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

김홍중 지음, 이음 펴냄, 3만3천원

사회학자 김홍중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소생을 재촉하는 봄비”에서 “죽음과 파괴를 연상하고 발작적으로 회피”하면서 21세기가 ‘그냥-있음’이 불가한 ‘가까스로-있음’으로 옮겨갔음을 포착한다. ‘가까스로’의 세계는 결여, 결손, 위급성에 묶여 있는 생태 파국 한가운데 있다. 책을 통해 학자는 시대를 진단하고 프랑스 사회학자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개념을 통해 대안을 제시한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

루시 이스트호프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펴냄, 2만2천원

저자는 8살 때 바다 한복판에서 페리 전복 사고를 마주하고 10살 때 영국 힐즈버러 축구장 압사 사고를 겪었다. 재난 전문가에게 전자우편을 보내고 재난이 벌어진 현장에 가까이 가고자 세계 최대 민간 장례업체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9·11테러, 인도양 지진해일, 런던 7·7테러, 그렌펠타워 화재,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등의 재난 현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복구’ 작업을 해왔다. 그 여정의 기록.

가도 가도 왕십리

김창희 지음, 푸른역사 펴냄, 2만2천원

왕십리에 삶의 터전을 두었거나 왕십리와 인연이 있는 22명의 이야기를 썼다. ‘민중의 몸짓’을 되살려낸 택견 명인 신한승, 민중의 애환을 웃음으로 승화한 만담가 장소팔, 아들을 구하고자 ‘반역 우두머리’가 된 선달 김장손 등이다. ‘포도청등록’ 등 수사·재판기록을 번역해 임오군란 당시 왕십리 사람들의 행적을 드라마틱하게 재현하는 등 세밀하게 취재하고 생생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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