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 소녀를 임신시킨 백인 남성…그림으로 남겼더니 2100억원에 팔렸다 [사색(史色)]
2014년 9월, 세계인의 눈이 한 ‘그림’으로 향했다. 엄청난 판매가를 기록해서였다. 중동 카타르의 왕족이 작품 한 점을 구매하는 데 우리 돈 2100억원을 냈다. 당시 기준으로 미술 사상 두 번째로 비싼 거래 대금. 작품은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When Will you Marry’였다. 남태평양 타히티 원주민 여성들을 자신만의 화풍으로 구현해낸 그림. 고갱은 살아 있을 땐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은 화가였지만, 죽음으로써 비로소 불멸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회자하는 건 단순히 ‘가격’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타히티’에 남긴 폴 고갱이라는 한 예술가의 족적이 남성중심적 성애로 가득해, 오늘날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독해되기 때문이다. 10대 초반 원주민 소녀들을 임신시키고, 그들을 백인 남성의 시선으로 성적 대상화 한 사람이 폴 고갱이었다. 그의 그림은 우리를 새로운 영감으로 안내하지만, 그의 캔버스에는 난잡한 성생활이, 체액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로부터 4년 뒤, 대통령은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했다. 나폴레옹 3세 시대의 개막. 민주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혁명가로 불린 모든 이들이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폴 고갱의 집안은 외가 댁이 있는 페루 리마로 향했다.

학교에 갈 무렵, 폴 고갱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왔다. 야만의 시골에서, 문명의 최전선으로 이동이었다. 프랑스 아이들은 고갱을 ‘페루의 야만인’이라 불렀다. 페루에서 배운 스페인어밖에 못하는 그의 모습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문명’ 프랑스는 고갱을 모질게 맞았고, 고갱은 너그러운 페루가 그리웠다. 이방이 고향이 되고, 고향이 이방이 된 역설. 고갱의 마음속엔 원시를 향한 애정이 싹텄다. 10대 시절부터 그가 상선의 선원이 되어 세계를 유랑한 것 역시 이같은 마음에서였다. 그에게 프랑스는 억압이었고, 원시의 세계는 자유였으니까.

일을 치르는 재간은 증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붓을 쥘 때도 그는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주식 시장이 마감하면, 그는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 심어진 풍경, 사람들이 주제였다. 붓칠이 끝나면, 자택 인근 카페를 찾았다. 당대 인상파 화가들의 아지트였다.

1884년. 시대가 고갱을 압박했고, 고갱은 더 세게 붓을 쥐었다.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공황이 찾아와서였다. 모두가 유가증권을 휴지통으로 던져버리는 시절이었다. 주식으로 벌어 먹고살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예술의 세계 역시 돈줄로 연명하는 건 매한가지여서, 붓질로 먹고살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고갱은 어차피 둘 다 돈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기로 했다. 건사해야 할 아내와 다섯 아이도 개의치 않았다. 가장을 믿을 수 없는 가족들은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났다. 아내의 고향이었다.

피사로는 고갱과 거리를 뒀다. 자신을 예술계로 이끌어 준 은인과의 결별이었다. 고갱은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인간에게 고립은 저주이겠지만, 예술가에겐 창조의 원천과 같은 것이어서, 고갱은 기존 인상파와 다른 자신만의 화풍을 쌓아가고 있었다. 굵은 윤곽선과 단순한 색상으로 대상의 본질을 구현하는 ‘쿨루아조니즘’(Cloisonnisme)이었다.


두 사람의 혼불은 짙고 짙어서, 서로 섞이지 않았다. 철학이 부딪쳤고, 고성이 오갔다. 188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평화로운 저녁 날. 고흐가 고갱에게 면도칼을 휘둘렀다. 고갱은 기함하며 그 길로 아를을 떠났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고갱은 홀린 기분이었다. 이국의 풍경에 황홀을 느껴서였다. 전시에 마련된 ‘타히티관’이었다. 쨍한 태양과 자연의 맥박이 요동치는 곳. 도시가 감히 범접하지 못한 곳. 이듬해 고갱은 타히티행 배를 탔다.


감정의 풍요함이 열매를 맺었다. ‘타히티의 여인들’, ‘해변에서’, ‘아베마리아’, ‘마나오 투파파우’가 탄생했다. 그는 작업한 그림들에 타히티어로 제목을 달기도 했다. ‘마나오 투파파우’는 “영혼을 생각하다”는 의미의 타히티어. 타히티를 향한 고갱의 애정이 읽히는 대목이다.

1893년 여름, 고갱이 짐을 쌌다. 돈이 떨어져서였다. 그림을 팔고 다시 돌아올 요랑이었다. ‘어린 신부’ 테후라가 임신했으나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언제 타히티로 올 것인지 언질도 주지 않았다. 성적 만족과 예술적 영감이 되어 줄 원주민 여인은 얼마든 있어서였다. 그는 타히티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건 타히티가 주는 쾌락뿐이었다. 파리에 돌아오자마자 인도네시아 자바섬 출신의 14세 소녀를 동거인으로 들였다.

1895년 6월, 고갱은 다시 쾌락의 땅으로 향했다. 타히티였다. 유럽에서 맛본 좌절을 뜨거운 태양빛으로 소독하고 싶었다. 다시 도착할 당시 고갱은 47세의 아픈 중년이었다. 몸은 썩고 있었지만, 성적 욕구는 시들거나 상하지 않아서 또다시 14세 소녀 ‘파푸라’를 동거인으로 들였다. 파푸라가 아들을 출산한 해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소박맞히고, 골려대고, 벌주던 프랑스에 고갱은 조롱으로 저항했다. 현지 주교를 모델 삼아 추잡한 노인으로 묘사한 그림(‘음란한 신부’)을 그리기도 했다. 식민 당국은 선동 혐의로 그를 감옥에 넣었다. 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라는 보고가 있었지만, 성병인 매독 때문이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원주민 여성을 향한 지독한 성적 욕구가 그를 집어삼켰다. 성욕은 그의 몸을 썩게 만들면서도, 기어이 비료가 되어 예술로 꽃피운 역설이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히바오아 섬의 폴 고갱 무덤. [사진출처=콜린 카네기]](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11/mk/20251011131206344hnjz.jpg)
ㅇ폴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공황을 맞아 전업 화가로 나섰다.
ㅇ제법 좋은 평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어려움을 겪으면서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원시의 나라로 떠났다.
ㅇ그곳에서 현지 소녀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는 수 많은 작품을 그려냈다.
ㅇ생전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로 타히티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사후 고갱은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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