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뒤 생활, 비우고 빼면서 행복감을 채우세요
#돈, 네 번째: 필요에서 충분으로

은퇴한 부부의 적정 생활비 규모는 얼마일까.
어떤 이는 300만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30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필요(必要)는 없으면 곤란한 것을, 충분(充分)은 모자람 없이 넉넉한 상태를 뜻한다. 똑같은 금액인데 해석이 다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후반부에 접어든 이들의 삶을 살펴보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이들은 전반부의 생활 양식을 유지하려는 습성이 강하고 심리적 하한선(bottom-line)이 있다. ‘충분’에 방점을 찍는 이들은 전반부의 관성에서 벗어나 생활의 틀과 내용을 바꾼 흔적이 보이고 심리적 상한선(upper-limit)이 있다. 필요를 따르는 사람(A)은 추락을 걱정하고, 충분을 따르는 사람(B)은 욕망을 경계한다.
물질적 소비냐, 시간 가치냐
A유형은 기준선 이상의 생활비를 조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현금흐름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돈벌이에 나서는 경우도 흔하다. 생활비를 아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B유형은 재무설계를 통해 불필요한 거품을 제거하고 합리적 소비의 기준을 정한 사람들이다. 월 현금흐름은 이들이 생각하는 필요의 범주를 충족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결핍의 정도가 크지 않아 돈벌이에 나서는 일은 흔치 않다. 물질적 소비가 주는 만족감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 가치를 높이는 것을 선호한다.

필자가 만난 은퇴자 중에는 A유형이 B유형보다 많았지만, 사는 모습은 B유형이 A유형보다 좋아 보였다. B유형 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었고, 자발적 빈곤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B유형의 생활 방식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필요의 범주’라는 개념이다. 필요의 사전적 정의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필요의 범주 즉 ‘어디까지가 필요인가’라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필요를 해석하는 심리 계좌(mental account)는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며 욕망과 뒤섞여 있다. 욕망은 소유하거나 누리고 싶은 마음이다. 물질이 아니라 심리다. 인간의 마음에서 욕망을 원천적으로 소거하는 건 불가능하다. 욕망은 삶을 이끌어가는 원천이기도 하다.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소유한 물건에 불만을 품도록,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하다는 믿음을 갖도록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한다. TV를 켜 놓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의 뇌 속 소비 욕망은 활성화된다. ‘행복하고 싶으면 구매 단추를 누르세요’라는 명령이 입력되면, 매트릭스(matrix)에 갇힌 포로들은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결제 단추를 누른다. 이 수렁에 빠지면 소비와 소유가 삶의 목표가 된다.
소비에 중독된 ‘호모 콘수무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소비에 중독되어 있다. 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 도넛처럼, 인간은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소비에 매달린다. 현생 인류의 정체성은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즉, 소비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구매한 물건이 주는 행복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다. 유행은 시시각각 바뀌고 소유한 물건은 이내 퇴물이 된다. 다시 불행이 시작된다. 우리는 코앞에 매달린 당근을 먹으려고 앞으로 내달리는 당나귀 신세다. 아무리 달려도 당근을 먹지 못하는 당나귀처럼,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큰 결핍을 느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미국의 경제학자 사무엘슨(P.Samuelson)은 행복은 소비를 욕망으로 나눈 값과 같다(행복=소비÷욕망)고 말한다. 이 공식에 따르면, 욕망(=분자)을 줄이고 소비(=분모)를 늘리면 행복 수치는 올라간다. 반대로 욕망이 소비를 압도하면 행복 수치는 내려간다. 따라서 행복해지려면 욕망은 절제하면서 소비를 늘리면 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욕망과 소비가 어떻게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욕망과 소비가 따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정은 ‘둥근 삼각형’이나 ‘시끄러운 침묵’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형용모순(oxymoron)이다. 욕망이 늘면 소비도 늘고 욕망이 줄면 소비도 줄기 때문이다. 둘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행복의 총량은 늘 제자리다.
물질 소비를 행복의 기초로 삼는 이런 접근법은 위험해 보인다. 행복하고 싶으면 부자가 되라(!)는 것인데, 배금주의(拜金主義)를 부추길 뿐 아니라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고 행복은 일차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류 지성사를 빛낸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행복은 돈보다 ‘관계’와 관련이 더 깊다. 소중한 이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행복감을 높일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비우고 빼는’ 생활양식으로
‘충분’의 원리를 따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합리적 소비를 통해 필요의 범주를 좁히고, 생활양식(life-style)을 새롭게 하면 된다. 채우거나 더하지(+) 말고 비우고 빼는(-) 것을 살림살이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다. 욕망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무엇보다 돈에 대한 관점과 철학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돈은 탁란(托卵)된 뻐꾸기알과 닮았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뻐꾸기가 붉은머리오목눈이 새끼들을 모조리 둥지 밖으로 밀어내듯, 돈을 추앙하면 삶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인생은 시간, 돈, 꿈의 함수다. 시간과 돈이라는 재료로 꿈이라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와 같다. 조리법은 똑같지 않다. 누가 어떻게 조리하는가에 따라 맛은 달라질 것이다. 이 방정식에는 3개의 변수가 있고 각각의 변수는 독립적이다. 앞의 둘은 수단이고 맨 뒤에 있는 것이 목표다. 돈의 자리에 다른 걸 넣을 수 있을까. 사랑은 어떨까. 이 비루한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사랑밖에 더 있겠는가. 잘 모르겠다. 만약 돈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물신(物神)의 지배에서 벗어나 삶의 주인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덧) 건강은 후반부를 지탱하는 4개의 기둥 중 하나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평균 수명이 늘고 있지만, 건강한 삶의 길이까지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한국은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가장 큰 나라에 속합니다. 다음 회차부터는 ’건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진수의 당신이 몰랐던 진짜 은퇴 이야기는?
문진수 작가는 학원 강사, 대기업 간부, 보험 판매원, 중소기업 임원, 사회적기업 대표, 비영리 재단 활동가, 공공기관 상임이사 등 다양한 섹터를 넘나들며 살아온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은퇴의 정석’ ‘은퇴 절벽’을 출간했고, 정년을 앞둔 분들을 대상으로 생애 설계에 대한 강연도 하고 있습니다. 돈이 선하게 쓰이는 세상을 탐구하는 사회적금융연구원 대표이기도 합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인생 주기(life cycle)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정년과 은퇴, 노후에 대한 궁금증이나 고민이 있는 분은 ‘당신이 몰랐던 진짜 은퇴 이야기’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한겨레 이메일(ggum@hani.co.kr)로 질문을 보내 채택되시면, 문진수 작가가 격주 월요일마다 생애 후반부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소담한 지혜를 나누어 드립니다. 한겨레 로그인 콘텐츠 ‘오늘의 스페셜’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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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진짜 은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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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수 | 작가·사회적금융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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