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금지한 단군의 역사,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다

김요한 기자 2025. 10. 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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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월 15일 나철, 단군 신의 모시고 제천의식 올리며 단군교 선포
1946년 미군정 당시 개천절을 국경일 지정
광복회는 개천절 대신 '국가기원절'로 명명해
독립은 선조들 투쟁으로 반만년 역사의 증거와 정체성을 찾은 것

■ 방송 : 경인방송 <굿모닝 인천, 이도형입니다> (FM 90.7MHz 오전 7~9시 방송)

■ 코너 : 개천절 특집

■ 진행 : 이도형 앵커

■ 인터뷰 : 송태현 광복회 대의원

■ 방송 다시 듣기 [클릭]

*인터뷰 저작권은 경인방송에 있습니다. 인용 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송태현 광복회 대의원. [경인방송DB]

◆ 이도형 : 경인방송FM 90.7MHz 굿모닝 인천 이도형입니다. 이 시간은 개천절 특집으로 광복 80주년 개천절과 독립운동 그리고 현재적 의미에 대해 송태현 광복회 대의원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의원님 안녕하세요?

○ 송태현 : 네, 안녕하세요.

◆ 이도형 : 예, 또 우리 경인 방송의 독립운동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 데요. 오늘 또 이렇게 개천절 특집으로 모셨는데요. 개천절 국경일로 정해진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 송태현 : 예, 개천절이 국경일로 정해진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바로 다음 해인 1949년입니다. 이때 3.1절, 제헌절, 광복절 등도 국가 법률로써 경축일로 정해졌습니다. 한글날은 2005년에 국경일로 승격되었습니다.

◆ 이도형 : 예, 개천절. 1949년에 이제 3.1절은 제헌절과 함께 국경일로 정해졌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개천절의 기원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송태현 : 네, 개천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하늘이 열린 날, 즉 개국 건국을 기념하여 제정한 국경일을 뜻합니다. 국경일에 대해 의미를 모르는 이는 드물겠지만 개천절에 대해서는 단순히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 정도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을 기리게 되었으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가 한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 이도형 : 예, 지금 단군 정신 얘기를 해 주셨는데요. 사실 저도 개천절 하면 우리 단군 신화 우리 학교 다닐 때 배운 것 정도밖에 사실은 그렇게 와닿지는 않습니다만은 그래도 우리가 단군. 민족 고유의 정서 이게 언제부터 이런 우리 한국인들의 인식에 이렇게 자리 잡게 됐을까요?

○ 송태현 : 예,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역사적으로 단군의 정신이 민족 고유의 종교가 된 것은 1909년 1월 15일 나철이라는 분이 단군 대황조 신의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올린 뒤 단군교를 선포하면서 그때부터 시작이 된 겁니다. 그 나철이라는 분은 러일 전쟁 이후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관직을 그만두고 오기호, 이기 등과 비밀 결사 유신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총리 대신에게 조선 독립을 촉구하며 도쿄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 항쟁을 벌이는가 하면 국내로 돌아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붙잡혀 유형 10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나철은 날이 갈수록 일제의 침략 야욕이 거세지는 상황에 민족정신을 바로잡아 보국안민과 제인 구세를 위하여 단군 정신에 주목하였습니다. 이에 단군교를 창시하였고 1910년 우리나라가 그 당시 이제 그 한일 합방이 돼서 나라가 망했지 않습니까? 그 국망이 닥쳐오자 대종교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1910년 당시 교인 수는 2만 1539명에 달했습니다. 이때 나철은 1909년 음력 10월 3일에 치렀던 개국절 행사를 개천절로 바꾸었습니다.
대종교의 창시자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린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 선생. [사진=연합뉴스]

◆ 이도형 : 예, 지금 나철. 아까 단군교라고 하셨잖아요. 아까 을사오적 얘기하다 보니까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 역사의 기원 단군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이런 인식, 아까 말한 단군교 얘기해서 해 주셨는데 인식은 그러면은 언제부터 이렇게 자리 잡게 된 겁니까?

○ 송태현 : 네, 우리나라 역사의 기원이 단군에서 출발한다는 인식은 고려 후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단군을 동국의 개국조로 여기는 역사 계승 의식은 이때 형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6세기에 사림 세력이 등장하면서 단군보다는 기자 손승이 강조되었습니다. 단군이 제일 먼저이지만 문헌으로 실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 이도형 : 예, 단군 정신, 단군교 그리고 언제 우리 역사의 기원이 됐는지 살펴봤는데요. 그런데 지금 일제가요? 개천절을 탄압하지 않았었습니까? 왜 이렇게 일제가 개천절을 탄압하고 괴롭혔죠?

○ 송태현 : 예, 일제는 단군 탄생을 황당하고 기괴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폄하하고 대종교를 유사 종교로 규정하였으며 개천절 행사를 금지하였습니다. 우리의 개천절 행사는 민족적 정체성 확인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동력이었기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동원 수탈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 등에 달아 개천절 행사 자체가 불가능해졌고, 그와 관련한 언론 보도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대신 일제는 자신들의 건국 신화를 절대적인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켜 일본 서기를 근거로 2월 11일을 기원절로 제정하여 개국 기념일로 공식화하였습니다. 이게 이제 일제 강점기 때 얘기입니다.

◆ 이도형 : 예, 그러니까 일제가 당시에는 일왕, 천왕이라고 자기네들은 그렇게 얘기하죠. 그러니까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 탄압하기 위해서 개천절을 핍박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개천절 이게 단순한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서 범민족적 행사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독립 의지를 다지는 계기도 되었다면서요.

○ 송태현 : 예, 그 나철은 백두산 아래에 중국 화룡현 청파호에 망명하였습니다. 거기서 망명을 해서 포교를 계속하였고, 북간도 교민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천절 행사를 치렀습니다.이는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 범민족적인 행사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개천절 행사는 한인들이 사는 곳 어디에서든지 열려 웅변대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마을에서는 떡을 쳐서 잔치를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음력 10월 3일 양력으로 11월 24일에 첫 개천절 행사를 개최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이를 건국 기원절이라 하였지만 개천절로 인식을 하였습니다. 다음 해부터 이제 1920년부터는 그 당시 임시정부는 개천절을 3.1절과 함께 공식 국경일로 제정하여 북경로 예배당, 서장로 영파 회관, 3.1당 민국로 침례 교회 등에서 이게 이제 당시 상해 우리 임시정부의 시가지입니다. 등에서 개천절, 3.1절 공식 행사를 국경일을 매년 두 번씩 하고 또 충칭으로 옮겨서 중경으로 옮겨서는 중앙문화운동회관 등에서 행사를 개최하였습니다. 임시 정부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피해 떠돌아 다녀야 했던 시절에도 선상에서 개천절 행사를 치렀습니다.

◆ 이도형 : 예, 지금 개천절, 아까 말한 건국 기원절. 이제 우리 임시정부가요. 상해에서 중경까지 이렇게 이동하는 이런 과정 속에서도 꼬박꼬박 행사를 하고 독립운동 그리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데 역할을 한 게 바로 개천절. 일제 시대 때 나름 개천절이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는 건데 그런데 이제 또 해방이 됐잖아요.

○ 송태현 : 네, 맞습니다.

◆ 이도형 : 해방 이후에 개천절 행사는 어떻게 치러지고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 송태현 : 우리가 이제 다 해방 이후의 세대인데요. 이제 우리 개천절 행사가 해방 이후에는 1945년 11월에 귀국길에 충청, 중경과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천절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당시 11월에 이제. 행사 날에는 안창호와 이동해는 송축사와 축사를 통해 단군의 민족적 의미를 예찬하며 종교나 이념을 초월한 민족 단합의 의지를 되새겼습니다. 민족 단합. 광복의 기쁨은 국내외 개천절 행사에도 나타났습니다. 국민당 위원장 안재홍은 단기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고 3천만 명의 동포들에게 아무쪼록 힘써서 성조의 기업을 확수하여, 불효자손이 되지 말자고 맹세하는가 하면 국조 순경의 사상을 고취하자며 단군전을 세우자는 분위기도 무르익었습니다. 이를 기회로 해방 후 처음 맞는 개천절 행사가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으로 열렸습니다.

◆ 이도형 : 예, 지금 광복 80주년. 우리 지금 개천절을 맞이해서 송태현 대의원님과 해설위원님과 얘기 나눠보고 있는데요. 우리 민족이요. 이렇게 개천절 쭉 유래와 그동안의 과정, 일제시대 때 어떻게 개천절 행사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봤는데요. 우리 민족이 개천절을 대하는 자세, 어떻게 해야 될 걸로 보세요?

○ 송태현 : 예, 1946년 미군정 하에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미군정 하에 46년에. 하지만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가자,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측은 동족 공영의 목표 아래 이해의 대치를 극복하고 남북 통일의 자주 정권 수립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또 1947년에 접어들면서 38선을 분계선으로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는 현실이 굳어져 갔고 여전히 미군정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해 개천절에 임시정부는 비통함을 토로하면서 자주독립, 즉 완전 독립을 위하여 3천만 명의 다 같이 새로운 투쟁을 하자는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습니다. 1948년 11월 한 민족이 둘로 분단되어 각기 다른 정부가 세워진 뒤에 첫 개천절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지만, 실상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이날은 휴무일로 정해 졌지만 지역별 기관별로 행사가 치러졌을 뿐 정부 차원의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서울시 주최로 서울 운동장에서 치러진 개천절 행사에 서울시장과 몇몇 장관들만 참석하였습니다. 어떤 메시지도 던져주지 못한 채 으레 기념식처럼 개천절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기가 어렵고 양 음력을 떠나 10월 3일이 소중하다며 아무 관련 없는 양력 10월 3일로 개천절로 제정해 버렸습니다. 당시 정부 차원의 개천절 행사가 강화도 참성단에서 개최되었지만 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등의 대독 경축사만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3부 합동으로, 1960년대에는 시민회관, 국립극장 등에서 국무총리 대독에 대통령 경축사가 낭독되었습니다. 또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 행사가 치러졌고 1988년 이후부터는 국무총리 경축사로 자리매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1984년, 1985년 2회뿐입니다. 개천절은 우리나라의 4대 국경일 가운데 하나이지만 단군을 국조가 아닌 대종교의 종교 행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단군 기념일을 개천절로 기른 것은 단군이 국가의 시조에서 민족의 시조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 나라 망한 이후 우리 민족은 다 같은 자손이기 때문에 뭉쳐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하였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분단 국가가 아닌 통일을 염원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도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으니 민족이라는 상생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날임을 모두 기억할 것입니다. 남과 북이 이견 없이 함께 공유하고 경청하는 날인 만큼 통일을 향한 양국 교류의 귀폭제로 삼았으면 어떨까 합니다. 

◆ 이도형 : 대의원님 지금 광복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광복회에서도 이런 개천절의 의미를 남다르게 부여하고 기리거나 그런 게 있습니까?
광복회가 10월3일 개천절에 건국기원절 기념식을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송태현 : 예, 매년 개천절 기념행사를 광복회 본에서도 하고 각 시도 지부에서도 자체적으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 이도형 : 예, 지금 대의원님이 학교에서 지금 초중고, 초등생들을 가르치시잖아요. 독립운동사라든지 독립운동사를 가르치고 계신 데 사실 단군 하면 홍익인간 이렇게 우리 알고 있잖아요. 아이들 요즘에 개천절 이런 단군 얘기하면 초등생들 잘 이해하고 관심을 보입니까? 어떻습니까? 현장에선?

○ 송태현 : 예, 지금 제가 다년간 초중고등학교 학생들한테 이제 우리나라 독립운동 정신 또 이제 여기에 결부된 우리나라의 역사를 쭉 가르치고 학생들하고 이렇게 참 대화도 나누고 하는데 이 개천절에 대해서는 아는 학생들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 이도형 : 그렇죠.

○ 송태현 : 저희가 이렇게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 국경일에는 집 집 마다 태극기를 계양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학교에 운동장에서 기념식도 하고 그런데 조금 안 된 얘기지만 요즘 국경일에 그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 교장 선생님이야 이렇게 기념식 하는 행사가 없는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우리 학생들이 우리가 흔히 우리나라의 경축일, 국경일이 다섯 국경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이렇게 한글날 이렇게 이제 5대 우리가 국경일. 그날을 우리가 나라의 이름으로...

◆ 이도형 : 경사스러운 날 또 이제 기념하고 있죠.

○ 송태현 : 이 개천절 이렇게 이제 그중에 3.1절, 경축일 광복절도 있지만 개천절에 대해서도 학생들이 너무 모릅니다. 지금 아까 우리 사회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홍익인간 이런 우리 고조선 역사 여기에서 배우는 기억만 했지만 이렇게 우리나라의 그 국가 기원 이게 이제 우리나라 상해 임시정부부터 이게 우리나라의 원년. 대한민국. 그 조선왕조가 이제 그 나라가 이제 새롭게 민국 공화 국가로 그 이제 이어지면서 개천절을 상당히 중요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그래서 이제 개천절 이런 용어도 우리가 이제 익숙해서 쓰고 있지만 우리 광복회 사실 국가 기원절. 이렇게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 이도형 : 국가 기원절이요? 오늘 단기 4358년. 개천절을 맞이해서 특집으로 송태현 광복회 대의원과 함께하고 있는데요. 의원님 마무리 오늘 개천절 맞이해서 말씀 듣고 오늘 인터뷰 마무리하겠습니다.

○ 송태현 : 지금 쭉 말씀하다시피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이렇게 온 것은 우리 참 선조들이 나라 독립을 위해서 참 우리 5천년, 반만년 역사의, 나라의 주권, 외교권을 뺏긴 거는 우리가 100년 내에 참 근세기에 와서의 일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제 나라를 참 독립을 위해서 국내에서 해외에서 우리 선조들이 피나는 투쟁을 해서 우리가 나라를 되찾은 겁니다. 나라가 독립한 겁니다. 이걸 우리 국민들이 이걸 확실히 알아서 이 나라의 그 정체성. 이걸 우리가 되새기고 이걸 알아야 국민된 우리가 뭔가 도리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는 우리 개천절. 또 3.1절, 광복절 이런 나라의 국경일을 그때그때 맞이할 때마다 되새기면서 우리 이런 나라의 경사스럽고 이렇게 참 되새겨야 할 날을 우리가 뜻깊게 생각해서 나라의 우리 국민으로서의 다짐을 새로운, 갖게 되기 위해서 개천절을 우리가 맞이해서 이런 걸 다시 한 번 생각을 해야 될 걸로 생각이 됩니다.

◆ 이도형 :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의원님 오늘 출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송태현 : 예, 감사합니다. 

◆ 이도형 : 지금까지 개천절 특집. 송태현 광복회 대의원, 경인방송 해설위원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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