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껍데기만 남아”... 기재부 사무관들, 게시판에 ‘근조 리본’ 달며 불만

김지섭 기자 2025. 10. 6.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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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 기재부” 추모 글 줄이어
“예산 빼앗기고 금융도 못 지켰다”
내부 게시판 비판 쏟아져, 이형일 1차관 뒤늦게 사과
“부총리는 뭐했냐” 불만 폭발 세제만 남은 재경부

“삼가 기획재정부의 명복을 빕니다.”

“저희도 근조 달고 와야겠네요.”

“R.I.P. 기획재정부.”

최근 금융당국 개편안이 전격 백지화된 직후 기획재정부 내부 익명 게시판 ‘공감소통’이 직원들의 자조와 분노로 들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대통령실이 지난달 25일 긴급 당정대 협의를 열고 금융위원회의 금융정책 기능을 재정경제부로 이관하는 방안을 철회한 이후부터다.

이재명 정부 들어 기재부는 정부 조직 분리 과정에서 예산권(기획예산처)이 떨어져 나간 데 이어, 금융 권한마저 확보하지 못하면서 장차관급 리더십에 대한 직원들의 불신이 극에 달했다. 내년 출범할 재정경제부는 ‘경제 사령탑’이란 명목만 남기고 실질적 정책 수단을 모두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게시판엔 추모 글·비판 쏟아져

6일 본지가 입수한 기재부 내부 게시판 캡처 화면을 보면, 고위 간부진을 향한 날선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 부 간부님들은 반성하셔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129개의 공감을 받으며 최다 공감 게시물에 올랐다.

기획재정부 내부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불만과 성토 글들 캡처 화면.

‘지나친 간담회 개최 지시’(57개 공감), ‘방구석 여포의 참패’(55개 공감), ‘경제 총괄 = 허울’(24개 공감) 같은 제목의 글도 잇따라 올라왔다.

조직에 대한 냉소도 이어졌다. “부총리직은 반납하고 조직은 세입처로 격하시키는 게 조직 기능상 맞을 것 같다”, “부총리 반납하고, 분수에 맞는 일만”, “국어를 배웠으면 주제를 알고 수학을 배웠으면 분수를 알 것” 같은 자조 섞인 글이 공감을 받았다.

기획재정부 내부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불만, 성토 글 캡처.

게시판에는 ‘R.I.P.(Rest In Peace·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기획재정부’라는 추모 문구와 조문 리본을 뜻하는 나비 이모티콘(▶◀)을 단 글이 여러 개 게재됐다.

◇이형일 1차관 긴급 간담회서 사과

내부 동요가 심상치 않자 이형일 기재부 1차관은 최근 직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공식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간담회에서는 사무관급 직원들을 중심으로 “도대체 부총리는 아무것도 못 지키고 뭐 했느냐”, “실국장이 아니라 장관이 나서서 사과해야 한다”는 거센 불만이 터져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기획재정부 내부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불만과 성토 글 캡처.

일부 국장은 최근 과장들에게 “사무관들이 심적으로 힘들어하니 업무적으로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는 지침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의 한 사무관은 “일이 힘들어도 기재부에서 일한다는 자긍심 하나로 버텼는데 핵심 기능을 모두 잃고 껍데기만 남아버려서 허탈함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말했다.

◇세제만 남은 재경부, 사령탑 유명무실

이번 금융 부문 이관 무산으로 재정경제부는 실질적 정책 수단을 대폭 상실하게 됐다. 경제정책의 3대 핵심 수단은 예산·세제·금융으로 꼽히는데, 재정경제부는 이 가운데 세제 분야만 쥐게 된 셈이다.

당초 구상은 기재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분리하되, 재정경제부가 금융위원회의 금융정책 기능을 흡수해 명실상부한 경제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획재정부 전경 /뉴스1

한 경제 전문가는 “기재부는 그동안 예산권을 보유했기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앞으로 세제 정책만 담당하게 되면서 사실상 일반 부처 중 하나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했다.

기재부는 “신설 재정경제부가 부총리 부처로서 경제사령탑 역할을 하는 데는 변함없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지만, 내부 직원들의 불신과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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