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녹아버리기 전에, 망고 빙수

김지은 기자 2025. 10. 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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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오늘 잉크는 초콜릿
카페 데일리오아시스 동편마을점의 망고 빙수. 달달한 맛에 깜찍한 오리 초콜릿의 조화로 눈까지 즐겁다.

연애상담을 해줄 때 가장 곤혹스러운 지점은 상대가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의 난 눈치 없이 이 형식적인 절차에 진지하게 임했다. 영글지 못한 연애들은 대체로 어리석은데다, 나는 무려 50대의 혜안을 지녔다고 착각하고 살던 20대였으니. 잘 안다고 자부하는 가까운 친구들에 대해서는 가히 독심술만으로 신점을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그 결과가 늘 좋은 건 아니다. “걔는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여과 없이 정직한 분석 결과를 내뱉으면 그 즉시 충격과 배신감이 서린 친구의 눈빛을 마주할 수 있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항상 거짓말을 하고, 관계가 지속될수록 입이 거칠어진다는 애인에 대한 고민을 듣게 됐다. 난 위로를 원하는 친구를 기꺼이 실망시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헤어지기 힘든 건 알지만, 계속 만나면 너만 상처받을 거야.” 포기를 모르는 나는 논리적으로 친구를 설득했고, 그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만하자고 단호하게 말해야겠어.” 마침내 받아들인 듯 체념한 듯한 친구의 말투에 호승심에 도취되어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이번엔 꼭 이별에 성공하고 좋은 사람 만나야 해? 또 못 헤어지면 그건 네 잘못도 있는 거야. 흐지부지 넘어가고 또 나한테 우는소리 하면 안돼. 상상만 해도 한심하다. 짐짓 으름장까지 놓으면서.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연애의 정답만 좇을 수 있다면 불행한 사랑을 그리는 드라마들은 왜 그리 성행하겠는가. 며칠이 지나 친구는 결국 남자친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보고 싶다고 기운 없이 말했다. 나름 열을 올리며 상담을 했던 나는 그녀가 괘씸했던 것 같다. 샐쭉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대답을 던진 채, 친구도 나도 그 주제에 대해선 영영 입을 다물게 됐다. 더 이상 너의 연애에 같이 화내주지 않으리라. 어차피 자기 인생인데 , 거두지 못한 업보는 자기가 감당하고 살라지 . 그런 못된 생각을 했던 것도 같 다 .

몇 년이 지났을까. 마음 한구석에 은은하게 그어진 휴전선이 지워지는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한여름에 만난 친구에게 나는 식사 후 망고 빙수를 먹자고 했다. “빙수는 더울 때 먹어야 하고, 망고는 여름에 먹어야 맛있잖아. 때를 놓치면 안 돼.”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시킨 샛노란 망고가 올려진 빙수는 구미를 당기기 충분했다. 딸기 빙수도 맛있지만 전성기가 겨울이니 제쳐두고, 팥빙수나 인절미 빙수는 언제든 먹을 수 있어 간절함이 덜하다는 보충 설명까지 했던 것 같다.

내겐 우유 얼음으로 만든 빙수를 먹는 순간은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에어컨 바람조차 못 견디고 순식간에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전투적으로 달려들고 싶었지만,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친구가 집중력을 흩트리는 한마디를 던졌다. “나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그 이후에 망고 빙수가 어떻게 됐는지는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친구는 과거 우리의 애매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더는 털어놓지 못했던 자신의 연애사가 어떻게 참담한 결말을 맺었는지에 대해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눈물을 흘렸다.

내가 놀란 건 친구의 러브스토리가 비극적 엔딩을 맺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고립되고 궁지에 몰렸다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까지 꾹꾹 눌러온 그녀의 사연들을 내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왜 그간 종종 만나면서도 그런 이야기 안 했냐는 내 질문에 친구는 우물거리며 답했다. “네가 날 위해 충고도 해줬는데 용기를 못 냈으니, 또 하소연할 염치가 없었어.” 멍하게 오래 묵혀둔 고백을 듣는 동안 빙수는, 아마 그냥 녹아버렸던 것 같다.

필리핀 보홀의 맛집 할로망고에서 주문한 빙수. 필리핀은 다양한 과일이 맛있지만 특히 망고는 절대 실패하는 법이 없다.

계절과일이 그렇듯, 위로에도 최적의 시기가 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나를 비난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 줄 단 한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다. 망고 빙수를 즐겨야 할 계절은 열심히 챙기면서, 소중한 지인이 가장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말을 섞을 동지조차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한동안 나를 먹먹하게 했다. 옹졸한 마음을 안고 먼발치서 고개를 꼬고 있는 동안, 친구는 혹독한 계절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답답하고 바보 같은 친구들의 고민에 ‘사이다’처럼 쾌감을 주는 해답을 제시하며 뿌듯해하던, 덜 여문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본인의 행동을 엄격하게 판단 받기 원한다면 얼마든지 온라인에 사연을 게재해 누리꾼들의 공개 선고를 받아볼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가까이에서 온기를 나누며 상담할 이를 찾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들은 도의와 상식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조금은 무모하고 때론 근거 없이 내 편이 되어줄 존재를 필요로 하고, 우린 그걸 ‘친구’라고 부르곤 하니까.

물론 그 후에도 친구들의 푸념에 마음에도 없이 “무조건 괜찮다”고 말하진 않는다. 다만 내 나름의 조언을 하더라도, 상대가 마음의 짐에서 도망갈 최소한의 샛길은 언제나 열어둔다. “답을 알아도 실제로 실행에 옮기긴 쉽지 않겠지만”, “네가 그렇게 못한다 해도 이해하지만” 하는 전제를 방파제처럼 깔아두는 거다. 여지를 남기는 ‘쿠션어’들이 갖는 간접적이고도 묵직한 힘을 이제는 안다.

요즘도 여름이 왔을 때 누군가 고된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하면 나는 망고 빙수를 곁들이자고 제안한다. 지금 이 순간 집중해서 먹지 않으면 금세 녹아 으스러지고 마는, 딱 이 날씨에 어울리는 아주 사치스러운 디저트를 먹자고. 머릿속 이 과거에 발목 잡혀 있건, 미래에 붙들려가고 있건 우선 당장은 현재에 충실해야 하니까.

그리고 상대방의 현재에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무조건적인 공감을 할 순 없겠지만 어쨌든 나는 네 편이며, 네가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선택을 해도 이해한다고. 면박을 줄 수는 있겠지만 비난하지는 않겠다고. 우리는 그러기 위해 서로의 곁에 머무는 것이니까. 나의 가장 힘들고 지친 여름에는 망고 빙수가 필요하듯, 너의 인생이 폭염에 시달릴 때도 내가 작은 도피처 정도는 될 수 있길 바라면서.

오늘 잉크는 초콜릿은?

술을 못 해서 디저트로 2차를 가는 것을 선호하는 김지은 기자가 늘어놓는 가벼운 수다 같은 에세이입니다. 팍팍한 일상에 지치셨나요? 김 기자가 풀어내는 달콤한 이야기를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https://www.hani.co.kr/arti/SERIES/3318?h=s)에서 만나보세요!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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