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태도다[서평]

2025. 10. 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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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허에 대하여
토마스 무어 지음│박미경 역│한국경제신문│1만9800원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며 살아간다. 잠시라도 멈추면 뒤처질까 불안해하며 일정표를 일로 빽빽이 채우고, 쓰지도 않을 물건으로 집을 가득 채우고, 마음을 온갖 불필요한 생각들로, 말들로, 감정들로, 욕망들로, 관계들로 채운다. 그러나 빈 공간을 억지로 밀어내리려 할수록 삶은 점점 더 무겁고 답답해진다. 그렇게 애써 채워 넣으면서도 우리는 왜 자꾸만 허무함을 느끼는 걸까.

‘영혼의 돌봄’으로 전 세계 수백만 독자에게 사랑받았던 작가이자 철학자이며 심리치료사인 토마스 무어가 신작 ‘공허에 대하여’로 돌아왔다. 이번 책의 주제는 ‘공허’다. 제목만 보면 허무주의적 사유를 담은 책처럼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책을 펼치는 순간 드러나는 정서는 정반대다. 저자가 말하는 공허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자유가 움트는 여백이다.
무어는 불교의 ‘무(無)’, 도가의 ‘무위(無爲)’, 기독교의 ‘케노시스(비움)’ 등 동서양의 영적 전통과 일상적 이야기들을 명상적으로 엮어내며, 침묵과 공허의 힘을 일깨우는 문장들로 독자의 내면을 조용히 흔든다. 반지 없는 손가락, 화살 없는 활, 빈 접시, 줄줄 새는 자루, 텅 빈 버스 좌석 등 상징적인 우화들과 감성적 에세이는 현대인을 위한 선문답처럼 짧지만 강한 사유,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대표적인 일화는 도덕경의 ‘바퀴 살’ 이야기다. 바퀴가 중심이 비어 있어야 돌듯, 마음도 빈틈이 있어야 흐른다. 그릇은 속이 비어 있기에 그릇으로 쓸모가 있으며 문과 창문은 비어 있기에 방 안에 빛과 바람이 드나든다. 삶에도 마찬가지로 창과 문을 만들어두어야 숨통이 트인다. 마음속에 편히 쉴 수 있는 빈 의자를 준비해야 사람들이 다가왔을 때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으며 머릿속에 여유로운 공간을 남겨놓아야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을 때 선뜻 받아들일 수 있다.

공허는 우리가 통제하려 애쓰는 삶의 균형추를 놓는 연습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일상의 빈자리, 시간의 느슨한 틈, 대화 사이 자리 잡는 정적을 억지로 채우지 말고 오히려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작은 명상으로 받아들이라 권한다. 그 빈자리, 틈새, 공백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숨결이 머무를 공간이며 진정한 변화가 스며드는 통로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공허는 심오한 영적 성취일 수도 있고 평범한 일상에서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평온일 수도 있다. 한 시간의 여유가 깊은 깨달음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현 없는 비파처럼 들리지 않아도 분명하게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로 ‘공허에 대하여’는 세상의 빈틈, 멈춤, 공백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는 여정을 안내한다. 삶이 버겁고 영혼이 무겁게 느껴질 때 조용한 해독제이자 쉼표가 되어줄 문장들이 가득하다.

삶이라는 연못에 뛰어들 때마다 굳이 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소란스럽지 않아도 깊고 단단하게 존재할 수 있다. 고요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과정이다. “온갖 소음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세상에서는 조용히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꼭 필요하지요. 자기 생각과 가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어떻게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나태주 시인은 “맑고 밝은 이 책이 우리네 삶에 부족한 청빈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평했다.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비우는 법을 망각하고 갖가지 소비품과 업적 그리고 명성 등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려다 피폐해져 버린 사람들에게 조용히 건네주고 싶은 책”이라고 추천했다. 이해인 수녀는 “공허가 채워주는 참 행복을 기대하며 공허를 자꾸만 더 갈망하고 맛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지금 이 순간, 바쁘고 복잡한 삶을 잠시 멈추고 공허에 귀 기울여보자. 공허는 때로 가장 충만한 형태의 위로가 될 수 있으니까.

오은환 출판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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