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되는 화폐 이야기[19] 위기의 조폐산업, 디지털 혁신으로 돌파구를 찾다

송신용 2025. 10. 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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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없는 사회, 피할 수 없는 변화와 도전
‘화폐 만드는 회사’에서 ‘보안기술 가진 회사’로
ICT·수출·문화콘텐츠 세 축으로 확장 전략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 직원이 인쇄된 은행권을 검사하고 있다. [조폐공]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본 지 얼마나 됐을까? 카드 한 장,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결제가 가능한 시대다. 우리에게는 편리함을 가져다준 이 변화가, 화폐를 만드는 조폐산업에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거대한 위기로 다가왔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는 이미 현금 거래 비율이 각각 10% 미만과 2~3%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역시 같은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이 2024년 발표한 ‘국내 지급결제 동향 분석’에 따르면, 전체 지급수단 가운데 현금(지폐 및 동전)의 비중이 15.9%에 그쳤다. 이는 2013년 41.3%에서 2021년 21.6%로 줄어든 뒤, 2024년에는 10%대로 내려앉은 결과다. 이러한 추세를 감안하면 현금 사용 비중은 앞으로도 계속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현금 없는 사회’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전 세계 조폐기관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수백 년간 이어온 핵심 사업이 빠르게 축소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한국조폐공사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고 있다.

조폐공사의 접근법은 단순했다. 위기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스스로를 재정의한 것이다. “우리는 화폐를 만드는 회사”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우리는 보안 기술을 가진 회사”로 정체성을 전환했다.

화폐 제조 과정에서 쌓아온 최고 수준의 보안 인쇄 기술과 품질 관리 노하우. 이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핵심 자산이었다. 조폐공사는 이 강점을 ICT, 수출, 문화콘텐츠라는 세 가지 축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디지털 플랫폼 분야에서 나왔다. 2019년 출시한 모바일 지역상품권 플랫폼 ‘착(chak)’은 현재 전국 82개 지자체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2025년 3월부터는 통합 온누리상품권 플랫폼까지 운영 중이다. 단순한 기술 전환을 넘어,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사회적 가치까지 실현한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조폐공사가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폐와 동전은 물론, 수표, 우표, 여권, 주민등록증 등 다양한 보안 인쇄물을 생산해온 경험을 토대로 단계적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는 무모한 도전이 아닌, 기존 역량에 기반한 전략적 진화였다.

글로벌 보안솔루션 전문기업 SICPA사 관계자들이 한국조폐공사 대전 본사에서 ICT협력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조폐공]


조폐공사의 변화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최근 스위스 본사의 글로벌 보안솔루션 기업 SICPA가 조폐공사를 찾아온 것이다. SICPA는 전 세계 화폐 대부분에 사용되는 보안 잉크 솔루션 분야의 선두주자다. 최근에는 데이터 워터마킹, 디지털 신원보안, 온라인 결제 등 ICT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그런 글로벌 기업의 고위 관계자들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 조폐공사의 디지털 전환 경험을 배우고자 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예방 차원의 방문이 아니었다. SICPA는 조폐공사와 ‘실시간 사회 보조금 분배 플랫폼’, ‘디지털 신원인증 및 온라인 결제’, ‘디지털 위·변조 방지 솔루션’ 등 구체적인 ICT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전통적인 제조업 기반 공공기관이 글로벌 ICT 기업의 협력 파트너로 인정받은 순간이다. 독일의 G&D, 프랑스의 옵세르 같은 글로벌 선도 기업들도 보안 기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시장으로 확장하며 성공했다. 조폐공사는 이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조폐공사의 사례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시장 환경이 급변할 때,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순간 도태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위기는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조폐공사가 공공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과감한 변화를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공공기관은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리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조폐공사는 이런 고정관념을 깼다.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며, 생존과 공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앞으로 조폐공사가 ICT 역량을 더욱 강화하고 글로벌 협력을 확대한다면, 현금 없는 시대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대표 사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전 세계 조폐기관과 전통 제조업 기반 공공기관들에게 실질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다.

우진구 조폐공 화폐박물관장


위기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온다. 하지만 그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극명하게 갈린다. 조폐공사의 행보는 디지털 전환 시대, 공공기관이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우진구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장

송신용 기자 ssyso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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