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무등산 산마을학교 이서분교장 (상) [남도학교 기행]

#환절기, 혁명의 계절
"혁명은 변방으로부터 시작된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이서면 버스 승강장 인근 천연 누룩 빵집 벽면에 걸린 이 문구를 어느 선배가 재인용했을 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무슨 신내림 의식처럼, 며칠 후 그 문구를 눈과 가슴으로 확인하기 위해, 오직 빵집으로 달려갔다. 젊은 날 가슴 들끓게 했던 혁명가의 어록이라니! 그러려니 했는데,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의 발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원문을 확인하고 싶은 채굴 본능이 발동했지만 현대인의 필수 역량인 정보 집적 능력의 한계였다. 그-렇-다! 중심부의 기류에는 변화나 저항보다는 어울림이나 동화의 속성이 은밀히,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그러기에 변방의 굶주림, 변방의 절박함, 그 목마르고 황량한 부대낌이 혁명의 불씨가 되곤 한다.
혁명이 필요했던 시대가 있다. 혁명만이 시대 과업이던 시절이 있었다. 농경과 북방 유목의 점이지역에 터를 잡았던 그들, 철제 무기와 기마용병술로 무장한 흉노 등 유목족으로부터 끊임없는 노략질을 당한 진(秦)왕조가 그랬다. 유목족이 자행한 약탈과 살육, 치욕과 능욕을 견디고 견디면서 그들이 획득한 것 역시 철제술과 기마술이었다. 그들이 쟁취한 철제문화와 기마술을 기반으로 한 방어력과 전투력은 획기적이었다. 기동성과 살상 능력에서 기존의 농경사회 도구들과는 혁명적 차이가 있음을 스스로 확인했다.
그리하여 찢겨진 근육의 상흔과 가슴 속 오욕의 처절함이 최초의 통일 혁명, 그 찬란한 힘으로 솟구쳤다. 변방의 절박함이 혁명 과업의 기반이 된 것이다.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참칭했던 진(秦)국의 통치자 영정( B.C.259~B.C.250)이 일군, 혁명보다 더 혁명 같은 통일 전쟁의 예가 그렇다.
치열했던 혁명가, 그 사유의 정점에서 빚어진 언어는 때로 고독하다. 그리하여 그 고독의 밑바닥을 훑은 계절의 절정에서 다시 혁명을 시도하였다. 산숭해심(山崇海深), 목포 주변 해양 문화의 심해성도 깊이가 있었거니와 산중마을의 정취도 융숭함이 있지 않겠는가. 맹렬했던 여름과의 이별식, 이쯤에서 이서 빵집 순례를 하고 싶었다. '혁명의 발원지는 빵집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이서 빵집 벽면에는 또 다른 영웅이 등장한다.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영웅이다.-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빵과 혁명의 영웅과 숭고한 산마을 기운을 맛보기 위해 이서로 방향을 잡았다.

#이서 가는 길
이서의 혁명은 어쩌면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바람결이었다. 남풍 혹은 동남풍이 멈칫멈칫 우물쭈물하는 순간 스멀스멀 갸름한 북풍이, 북서풍이 시작되는 것이렸다. 이서의 바람, 편서의 바람, 드디어 풍향계가 방향을 바꾸었다. 바람(風)과 바라봄(望)의 혁명, 고도가 400m에서 600m이니 어림잡아 평균 고도 500m, 인간이 정서적으로 가장 안온함을 느낀다는 그 지점, 이서의 들녘은 벌써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서 가는 길은 탈속세의 길이다. 이서를 관통하는 적벽로와 백아로는 자못 한적하다. 오후 4시, 가을 편지라도 쓰고 싶은 감성이 우러나는 이서우체국 앞에 앉아 10분을 기다려도 지나는 차량에 손을 흔들기란 쉽지 않다. 옛 선현들의 멋을 살려 "청류에 갓끈 씻고, 탁류에 짚신 털며" 산천 주유를 해보려나 했는데, 이서 가는 길이라면 그런 나그네 객기 한 조각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광주와 화순을 지나 217-1번 버스 구석진 창가 자리에 몸을 구기고 앉아 야사리에 가리라! 야사리 느티나무와 수더분한 차림의 빵집 아낙을 만날 수 있으리라! 이서 여행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서 가는 버스는 야사리가 원점이며 종점이다.
#변방 마을
비교적 근래인 『여지도서(輿地圖書)』(1759)나 『대동지지(大東地志)』(1864)와 같은 옛 지리지나 지도를 살피면 동복현 관할 7개 면 중 내서면과 외서면은 분리되어 있었다. 마을 지형이 쥐를 닮아 서촌(鼠村)이라고도 했던 모양인데, 조선 후기 숙종 대에 동복현을 재설치할 당시 현의 치소(현 동복면 독상마을)보다 서쪽에 있다 하여 서촌이라고 했던 지역이다.
1984년 동복댐 확장으로 상당 지역이 수몰되고 말았지만 현재의 서리(혹은 서촌)를 기준으로 동복면 치소 쪽이 내서, 무등산 규봉암 쪽이 외서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내서, 외서를 아울러 이서면(二西面)으로 통합하여 화순군에 편입하였다. 거주 인구는 대략 509세대, 925여명 정도이다. 밤 8시 무렵 현지인 맛집 '이서가든'마저 문을 닫고 불을 끄고 나면, 세상이 온통 적막강산, 그러니 징상맞은 고을이다.
국경이 아닌 산중 변방이었으니, 서쪽으로는 무등산 규봉암 자락, 동쪽으로는 동복호와 동복면, 북서쪽으로는 담양군 가사문학면, 북동쪽으로는 백아면을 이웃하고 있는 분지형 고을이다.

#뿌리 깊은 나무와 야사리 나무
실학의 선구자 나경적, 근현대 이서 교육을 일으킨 하응락과 채병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공동 대표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했던 장두석 등 이 지역 출신 근현대 인물들에 대한 얘기는 <하>편에서 하려고 한다. 이서에서는 인물보다는 자연이 우선이다. 그렇기에 이서를 대표하는 마을 풍경을 짧게 소개하고, 특별히 이서의 명물, 아니 조선팔도를 대표하는 유람 명승 적벽(赤壁) 얘기를 뉘엿뉘엿 풀어 볼 생각이다.
우편소는 마을 중심에 있기 마련이다. 그 곁에 '야사리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 아래 우편함마저 설치되어 있으니 가을 편지를 쓰기에 친절한 장소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조선 성종 때 처음 마을을 일구면서 심은 것이라 하니, 지금의 마을 주민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시절부터 마을지킴이였으며, 복을 들이고 액을 막는 수호목이었다.
1982년 어느 멋진 가을날에 천연기념물 제303호로 지정되었다. 전래 풍속에서는 은행을 귀한 과일로 여겼으며, 그 열매를 학자나 영재를 상징한다 하여 서원이나 향교 등 교육기관에 주로 상징목으로 심었다. 그러한 소명이 깊이 담겼을 터, 이 신성한 나무는 신통력이 있어 국운이 융성하면 가지를 넓게 펴서 화평을 알리고, 전란이 날 것 같으면 울음을 내어 재난 경보를 했다고 한다.
마땅히 마을 사람들은 새해와 정월대보름에 제를 올리며 풍년과 행운을 기원하고 있다. 남성의 생식기 또는 여성의 가슴을 연상시키는 유주를 비롯하여 가을날 11월의 오후 자태가 가장 아름답다는 귀엣말을 들었다.

#물염정(勿染亭)과 규봉암
향토문화재로 분류된 물염정 얘기는 <하>편에서 따로 하려고 한다. 인위적 제재를 하지 않은 자연목의 멋을 살려 기둥으로 세운, 영락없는 물염정이다. 죽장에 삿갓 차림으로 전국을 떠돌았던 김병연도 몇 차례 찾았던 곳이라 하니 나도 두어 차례 더 들러야 할 듯하다. 조선 중기에 성균관 전적, 구례와 풍기(경북 영주시)에서 군수를 지냈던 송정순(宋庭筍, 1521~1584)이 자신의 호를 따서 당호로 삼았다. 2024년 가을, 틀림없이 외손의 후손일 나종영이 펴낸 '물염의 시'가 있다.
규봉(圭峰)은 '모서리 지고 각이 진 봉우리'란 뜻이다. 규봉암을 병풍처럼 둘러친 광석대를 비롯한 100여 개의 주상절리, 은신대·삼존석·십이대·풍혈대·설법대 등을 말한다. 그렇게 바람막이가 된 마치맞은 오목한 곳에 절집을 창설했으니 규봉암이다.
자연의 창조와 인문의 절집이 조화롭게 구성된 명승 중 명승이다. 화폭으로 연출된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현재는 송광사의 말사로 운영되고 있다. 절집 규봉암에 기도 하랴, 주변 바위에 눈공양 하랴? "규봉암 보지 않고 무등산 올랐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몽유도원의 세계가 이렇지는 않았으리.
신라의 고승 의상이 '가뭄에도 석간수가 졸졸졸 흘러나오는 모습(有水潺潺 然瀉出 乎石眼, 유수잔잔 연사출 호석안-『신증동국여지승람』 화순현 불우조)'을 보고 마땅히 여겨 이곳에 처음 불사를 하였다고 한다. 신라 김생이 썼다는 '규봉암' 편액, 도선국사와 관련한 얘기, 고려 대각국사 의천의 '유제 서석산 규봉사(留題瑞石山圭峰寺)', 보조국사 지눌과 인도 승려 지공, 나옹화상과 김극기 그리고 조선조 민충원 등과 관련된 수많은 고승명필들의 수행터이자 순례지였다. 인연도 인연이려니와 주변 천연 창조물을 배경으로 알맞게 들어앉은 인공 규봉암 절집이 경이롭도록 조화롭다.
#시무지기 폭포
지난 1월, 퇴직 기념으로 남미 아르헨티나~브라질에 걸친 이구아수 폭포(Puerto Iguazu)를 친견한 적 있다. 상상의 극한 영역 밖에 있는 장관이었다. 수직의 장엄한 물내림도 얼얼했지만 무지개가 서넛, 때로는 대여섯씩 걸리기도 했다.
이서면 용강마을에는 세 개의 무지개가 뜬다는 폭포가 있다. '시'는 세 개, '무지기'는 구수한 남녘말로 무지개를 뜻하는, '세 무지개 폭포'이다. 비가 그쳤다가 햇살이 나면 달려가 볼 일이다. 무등산 천왕봉에서 달리기 시작한 물줄기가 해발 700m인 이곳에 이르면 약 70m의 물줄기를 발산하며 낙하한다.

#적벽 가지 않을래?
혈류와도 같은 강의 흐름, 물줄기를 살펴보자. 무등산에서 발원한 새끼내(문순태 소설 『타오르는 강』의 중심 배경지 영산강 지명에서 차용함.) 영신천과 안심천은 동쪽으로 흘러 이서의 중심 야사우체국 앞에서 한 차례 주변 물길을 모아 회합한다. 힘을 얻어 도석까지 흐르다가 동북쪽 백아산 자락에서 흘러온 또 다른 샛강 창랑천, 와천천, 다곡천과 거듭 합하여 적벽에 이르러 적벽강을 이룬다.
물길의 주류는 영신과 창랑이다. 영신(靈神)과 창랑(滄浪)이라니! 무등산을 빠져나온 영험한 산신령이 푸른 물결과 일가를 이뤄 머뭇머뭇 더디 가는 곳, 이 지역 자연 지형인 석벽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내는 곳, 그리하여 뭇 묵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적벽강의 풍모가 이렇다.
그리하여 적벽을 석벽(石壁), 수벽(水壁), 심벽(心壁)이라 했다. 강물은 남쪽으로 조금 더 흘러 동복 치소 근처에서 동복천이 되었다. 동복천의 물길은 다시 보성강과 섬진강을 거쳐 하동이 건너다 보이는 광양 망덕포구 즈음에서 몸을 풀어 남해에 닿는다.
40여 년 전 동복댐 확장 공사로 인해 도석리, 창랑리, 장학리, 보산리, 월산리, 서리의 옛 마을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 수몰지가 확장된 동복호이다. 마한의 54개 소국 중 하나인 벽비리(壁卑離) 지역이다. '비리'는 '부리(夫里)' '벌(伐)' 혹은 '불(弗, 火)'의 예처럼 작은 평야, 벌판, 소국 또는 소읍을 뜻한다. 그러니 '석벽이 있는 소국' 정도이겠다. 최초의 부족국가인 마한 시절에도 석벽, 즉 적벽은 존재했었다는 문헌적 증빙이다.
2017년 국가 지정 명승(제112호, 명칭은 '화순 적벽')으로 지정된 적벽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지정된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화순온천, 이서 커뮤니티센터 그리고 화순적벽 입구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월~화요일은 휴업이며, 수~일요일에 운영된다.
특별히 토, 일요일에는 화순읍 '이용대 체육관'에서 출발하는 투어버스도 있다. 셔틀버스는 현지 탑승이 가능하지만, 투어버스는 인터넷 예약을 해야 한다. 이동 시간을 제외한 현지 관람 시간은 약 30분 정도이다.
#번개에 콩 굽기
동복호를 배경으로 한 적벽은 이서면 창랑, 장학, 보산리 일대에 걸친 7km에 이르는 퇴적층 암벽이다. 붉은색을 띠는 절벽 바위층, 적벽이다. 지역별로 물염과 창랑, 보산과 장항적벽으로 나뉜다. 앞의 두 곳은 늘 개방되어 상시 접근할 수 있으며 보산과 장항적벽은 허가된 시간에 셔틀버스로 진입하여야 한다. 우리가 아는 대표 적벽은 장항적벽(노루목적벽)이다. 폭 300m, 높이 70m였던 것이 지금은 절반 정도 물에 잠겨 있다.
조선 초까지는 이 일대 지형을 보통명사로서 석벽(石壁)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광양 백운산 자락에서 태어난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1483~1537)의 상상력 덕분에 적벽으로 개명되었다. 중종이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을 제거한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동복에 유배된 그는 이 장엄한 광경을 보고 '적벽(赤壁)'을 연상한 것이다. 석벽은 지리적이지만 적벽은 문학적이지 않은가.
중국 양쯔강 중류인 후베이성 츠비시(湖北省 赤壁市)에서 전개된 '적벽대전'을 떠올렸을 테지만, 최산두 역시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연의演義란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재미와 교훈적 요소를 가미한 창극이란 뜻이다. 우리가 흔히 읽는 『삼국지』는 '소설 삼국지'인 셈이다.)와 정사인 『삼국지』에 등장하는 적벽을 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해남읍 해리 출신으로 송강 정철의 스승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0)은, 마치 중국의 적벽 낭떠러지 바위에 새겨진 붉은색 '적벽'처럼 이곳 중앙에 적벽동천(赤壁洞天, 동천은 도가에서 일컫는 신선이 사는 지상낙원)이라 새겼다.
이후 적벽을 언급한 글로는 하서 김인후의 '적벽시'가 있고, 널리 알려지기로는, 동복을 사랑한, 영원한 노마드 김병연(김삿갓, 1807~1863)의 '무등산고송하재 적벽강심사상류(無等山高 松下在. 赤壁江深 沙上流, 무등산 높다 하되 소나무 아래 있고, 적벽강 깊다지만 모래 위로 흐르도다.)'라는 싯구가 있다.
관람 통로는 일방향이다. 시간도 제약이며, 해설사와 관리 요원이 통제에 가까운 안내를 하기에 여유로운 감상과 감흥은 어려운 형편이다. 가을이 으뜸이지만 느낌이 다를 테니 계절별 탐방도 좋으리라 본다.

망미정(望美亭)은 정지준(丁之雋, 1592~1663)이 적벽을 마주 볼 수 있는 강언덕에 지었던 정자였지만 수몰을 피해 이곳으로 옮겼다. 병자호란 때 청과 화의가 이루어진 것에 비분강개하여 낙심, 낙향하여 이곳에 은거했던 인물이다.
소현세자나 청에 인질로 끌려진 삼학사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판은 전 대통령 김대중의 글씨이다. 남쪽에도 같은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는 추사 김정희의 동생 김상희(琴麋 金相喜, 1794~1861)의 것이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현재는 제주 출신 현중화(素菴 玄中和, 1907~1997)의 것이다. 드론 등 항공 사진이 아니라면 (장항)적벽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장소이다.
대개 그렇지만, 정상에 위치하여 조망이 좋은 망향정(望鄕亭)은 수몰민이나 출향민들을 위한 조망 시설이다. 현판은 이서면 안심마을 출신으로 한국서예가협회 자문위원, 광주교대와 조선대에서 서예와 한학 지도를 하기도 했던 송파 이규형(松坡 李圭珩, 1937~ )의 작품이다.
피아골 연곡사 대적광전 편액과 화순 능주면 입구 '牧使고을 綾州門'도 그의 작품이다. 아흔을 내다보는 나이, 그의 활동 공간이었던 광주시 대인동 삼락서예원은 현재 그의 딸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이야기가 또 길어졌다. <하편>에서는 이서의 인문학, 교육과 문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바람이 분다, 이서의 바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