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36도에 ‘냉수마찰’? 남극 얼음 서걱서걱 웨델물범에겐 ‘온천욕’

카페 브랜드 ‘스타벅스’ 로고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의 인어 ‘세이렌’이 그려져 있다. 배를 타고 가는 선원들을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유혹해 바다에 빠지게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북유럽 신화에도 인간 형상을 한 상체와 물고기 꼬리지느러미 같은 하체를 가진 인어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1837년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은 이를 모티브로 ‘인어공주’라는 유명한 동화를 남겼다.
이러한 신화에는 그 모티브가 된 원형이 있다. 인간의 상체를 연상시키는 몸통에 지느러미 같은 발이 달린 기각상과(Pinnepedia) 동물들이다.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해양포유류인 기각상과는 물속에서 주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지만,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기 위해 해안가 육지나 얼음 위에도 올라온다. 이 때문에 예전부터 인간의 눈에 많이 띄었을 것이다.

기각상과에 속한 물범, 물개, 바다코끼리 가운데서도 물범(Phocidae)은 매끈한 상체와 커다란 눈, 동그란 머리 모양 때문에 외형적으로 인간과 유사해 보인다. 물범은 전 세계에 18종이 있는데, 남극을 비롯한 극지뿐만 아니라 적도 부근까지 전 세계에 폭넓게 분포한다. 겉으로 돌출된 귀가 없고 발이 짧아서 뭍에서 잘 걷지 못하지만, 물속에선 그 어떤 동물들보다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
남극해에는 웨델물범(Weddell seal, Leptonychotes weddellii), 남방코끼리물범(Southern elephant seal, Mirounga leonina), 게잡이물범(Crabeater seal, Lobodon carcinophaga), 로스물범(Ross seal, Ommatophoca rossii), 표범물범(Leopard seal, Hydrurga leptonyx)까지 총 5종이 분포한다. 이 가운데 남극 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과학기지 인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해양포유류는 웨델물범이다.
그 덕분에 남극에 처음 방문했던 지난 2014년부터 웨델물범을 만날 수 있었고, 2020년엔 물범 연구과제 책임자를 맡아 본격적인 생태 연구를 시작했다. 웨델물범은 몸길이가 약 2~3m에 달하며 무게는 400~500㎏ 정도 나간다. 보통 얼룩진 회색 혹은 갈색을 띠는데, 개체마다 차이가 큰 편이다.
웨델물범이 사는 곳엔 얼음이 있다. 특히 해안가 육지에 고정된 바다 얼음(fast-ice)을 좋아한다. 이러한 얼음 지대는 해안이나 해저, 혹은 땅에 닿은 빙산에 붙어 있어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새끼를 낳아 키우기에 적당하다. 웨델물범이 남극 얼음을 좋아한다는 특성을 들었을 때 처음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추운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극의 혹독한 추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의문은 더 깊어진다. 남극 로스해 테라노바 만에 있는 장보고 기지는 겨울에 영하 36.4도까지 떨어진다. 그런데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다. 대륙 안쪽에 있는 프랑스-이탈리아의 콩코르디아 기지의 겨울 기온은 평균 영하 55도에 이르며 최저 영하 80도까지 온도가 떨어져 매우 춥다.

다만 물속에 있다면 그리 춥지 않다. 빙하가 녹아 바다로 흘러 들어간 물은 영하 1~2도 정도로 차지만, 액체 상태의 물은 기본적으로 어는점 이하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지역에 따라 혹은 수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면 부근에선 어는점보다 약간 낮은 정도로 유지된다. 따라서 겨울철 장보고 기지 앞바다를 헤엄치는 물범은 기온보다 30도 이상 따뜻한 온도를 즐기는 셈이다. 온도의 범위는 다르지만 마치 온천욕을 즐기는 사람들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물속엔 먹을 게 많다. 혹독한 기온 탓에 물 밖은 온통 얼어붙어 버려서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거의 없지만, 물속에선 비교적 안정적인 수온이 유지되며 해양 순환류를 따라 공급된 영양분 덕택에 플랑크톤이 번성하고 물고기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상위포식자인 물범은 주로 큰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커다란 덩치를 유지한다.
물고기는 아가미로 호흡하기 때문에 1년 내내 물 밖으로 나오지 않지만, 웨델물범은 기본적으로 폐로 호흡하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숨을 쉬기 위해선 수면으로 나와야 한다. 남극의 여름엔 따뜻한 공기와 수온 덕분에 바다 얼음이 깨지면서 구멍이 많이 생겨 숨을 쉬기 쉽다.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얼음 위에서 3~4개월간 새끼를 키우거나 종종 얼음 위로 나와 잠을 자고 들어가기도 한다. 겨울은 얘기가 다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륙 인근 바다는 대부분 얼음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숨구멍을 찾기 어렵다. 남극 대륙 주변 바다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얼어 버린다.
따라서 남방코끼리물범과 같이 비교적 온화한 환경을 선호하는 종은 겨울이 되기 전에 따뜻한 북쪽, 남극 대륙보다 위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동한다. 웨델물범 조상은 남방코끼리물범과 다른 선택을 했다. 겨울에도 남극에 남아 버티기에 들어갔다. 버틸 수만 있다면 경쟁자가 적기 때문에 홀로 바닷속 먹이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겨울을 버티기 위해선 일단 숨을 쉴 수 있어야 한다. 얼음 틈으로 콧구멍을 내밀어 산소를 들이마셔야 버틸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웨델물범은 직접 얼음을 깨거나 얇은 얼음을 찾아내 구멍을 넓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보통 포식동물들의 앞니와 송곳니는 먹이를 잡을 때 쓰지만, 웨델물범은 얼음을 깨는 용도로 쓰기도 해서 다른 물범들과는 특별한 형태를 띤다. 앞니와 송곳니가 앞으로 돌출돼 구부러진 독특한 형태인데, 특히 앞니 네 개 중 바깥쪽 두 개는 가운데 두 개보다 훨씬 크고 끝이 뭉툭하다.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위턱은 고정된 상태로 아래턱이 움직이는데 거의 180도 가까이 입을 벌릴 수 있어서 얼음을 윗니와 아랫니로 긁을 수 있다.
매서운 바람과 얼음 아래에서 조용히 얼음을 긁어내며 구멍을 만들어 숨을 쉬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서걱서걱 얼음이 깨지며 웨델물범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나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작은 탄성을 냈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적응한 생명체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감탄이었다. 남극의 얼음은 물이 결정화하며 고체화한 결과물이지만, 웨델물범에겐 삶의 터전이나 도전의 장이다. 얼음을 깨고 숨구멍을 만드는 능력을 진화시켜 남극의 겨울에 적응한 덕분에,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남극해 전역에서 일 년 내내 서식하는 유일한 해양 포유류가 됐다.
아주 극한의 세계는?
히말라야산맥을 넘는 줄기러기를 아시나요? 영하 272도에서도 죽지 않는 곰벌레는요? 인간은 살 수 없는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고 살아가는 동물이 많은데요. 여름엔 북극, 겨울엔 남극에서 동물행동을 연구하는 이원영 극지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지구 끝 경이로운 생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아주 극한의 세계(https://www.hani.co.kr/arti/SERIES/3304?h=s)에서 만나보세요!
이원영 극지연구소 선임연구원·동물행동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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