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생각의 바다에 가다 [김영민 추석 칼럼]
편집자주
몇 년전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독특한 칼럼으로 큰 화제가 되었던 김영민 교수(서울대 정치외교학부)의 칼럼을 싣는다. 추석을 앞두고 김 교수에게 '추석이란 무엇인가 2'를 의뢰했지만, 김 교수는 인문학이 사라져가는 한국 현실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추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위트는 없지만, 대신 대한민국 지식인의 깊은 고뇌를 담고 있다.
'김우창 선생이 누구냐'는 세상
인문학의 쇠잔과 함께 한 세월
어느 추석, 선생이 들려준 일화

인문학자 김우창 선생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가 올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였다. 아주 긴 제작 기간 끝에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내 대학시절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 게이트가 열렸다는 말과 다름 없었다. 뭔가에 홀린 듯 부산으로 내려가 영화진흥위원회 시사실에 앉아 첫 상영을 기다렸다.
김우창 선생이 누구냐고? 이런 반문이 필요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젊은 세대는 선생을 예전만큼 잘 모른다. 상영 직후 열린 관객과 대화시간에 최정단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김우창 선생의 책을 사러 대형 서점에 갔는데, 매대가 아니라 창고에서 책을 꺼내오더라고요." 선생에게는 오랫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인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데, 사람들은 이제 그의 어렵고도 치렁치렁한 글을 정작 잘 읽지 않는다.
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인문학의 거장" 운운하는 수식어가 예전부터 달갑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이 원하지 않았을 표현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쯤에, 선생이 장관급 고위직을 고사했던 일화가 나오는데, 정부 고위직을 그렇게 마다하는 사람이 그런 수식어를 반겼을 리야. 선생은 오랫동안 국가가 주도하는, 혹은 국가 발전에 공헌하겠다고 설레발 치는 학문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정작 경험해야 할 것은 그런 수사가 주는 현혹이 아니라 선생이 평생 헤엄쳤던 "기이한 생각의 바다"이다.

물론 영화는 그 바다의 깊이와 넓이를 속속들이 측량하려들지는 않는다. 선생이 생각하고 고민했던 세계의 전모를 제시하려들지는 않는다.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쇠해가는 생명체의 아슬아슬한 생존투쟁이다. 선생은 서재에서 늙어가고 거실에서 늙어가고 마당에서 늙어가고 길에서 늙어간다. 그리고 주저앉고 넘어지고 쓰러진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병원으로 실려간다. 의사는 입원을 권하지만, 환자는 고집이 세다. 그러한 시간이 반복된 끝에,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온다.
이것은 고통스럽다. 당사자에게뿐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그러나 선생은 시종일관 고통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다. 고통은 실로 고통스럽지만, 고통의 감수를 통해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위엄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한다.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상징성을 얻는다. 반복해서 계단 오르는 장면, 반복해서 비탈길을 걷는 장면, 반복해서 겨울을 나는 장면, 반복해서 겨울 바다에 눈이 내리는 장면. 이 장면들은 모두 감내 중인 고통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이 고통을 감내하는 시간은 곧 노쇠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간이 다했을 때, 인간은 어디에 도착하는 것일까.
김우창 선생이 노쇠해가는 시간은, 하필이면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이 쇠잔해가는 시간과 겹친다. 선생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대에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고 인문학에 대한 국가적 지원도 부족했지만, 인문학의 가치를 공개적으로 폄하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학문의 다양성이라는 옹색한 구호로 인문학을 변호해야 하는 시절도 아니었다. 오늘날 인문학 진흥은 국가 정책의 일부이기도 하고, 그 어느 시절보다 많은 논문이 양산되지만, 선생은 논문이라 부르는 형식을 빌지 않고도 기이한 생각의 바다를 만들어 냈다.
그 바다에 가면 인간의 조건을 직면한 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를테면, 선생은 갑자기 생각난 듯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학교 물리 선생님이 어린 학생들과 함께 밤하늘을 보면서 별자리를 일일이 가르쳐주었다. 카시오페이아나 북극성 같은 것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와보니 그 선생님은 전쟁으로 인해 죽고 없었다." 노쇠한 인문학자가 전하는 이 어린 시절 추억에는 성년이 되어 펼쳐나갈 생각의 편린이 이미 들어 있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불합리한 집단적 갈등에 대한 냉정한 인식, 불시에 찾아올 죽음을 끝내 피할 수 없는 인간 실존에 대한 통절한 감각, 목전의 충동을 넘어 존재하는 저 별자리 같은 세계에 대한 심원한 상상, 그리고 절실한 개인적 체험에 충실하되 기어이 그 넓고 깊은 세계로 연결되고자 하는 원초적 열망.
오랜만에 다시 듣는 선생의 강의를 거쳐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선생이 국제적(?) 제사 혹은 차례를 지내는 모습이 등장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과 손주들을 영상으로 연결하여 한자리에 모은다. 그리고 한국어를 잘 모르거나 서툰 손주를 위하여 영어를 사용해서 제사에 대해 설명한다. 그렇다. 선생은 추석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세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옛날 방식대로 제사를 고수한 사람도 아니었다. 변화의 와중에 있는 사물의 존재 조건에 대해 집요하게 성찰한 사람이었다.
어느 해의 추석 무렵이었나. 자택을 찾은 나에게 선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에게 잘하려고 노력했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는 잘 몰라요. 그러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을까. 선생은 평생에 걸쳐 읽고 썼다. 동시대인을 위해 읽고 썼다. 후학들을 위해 읽고 썼다. 녹내장이 악화되고, "이제 나는 쓰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되뇌이는 그 순간까지 읽고 썼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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