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레터. 남자는 100m 출발선에 선 것처럼 초조했다. 올해 고교 졸업 후 미국 유학에 나선 박모(20)씨. “지난 2월 광화문 미대사관에서 비자 발급 인터뷰를 봤는데, 너무 긴장해서 영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10분 뒤 영사가 노란색 종이를 주더라.” 노란색 종이는 ‘옐로 레터’로 미국 비자 발급 거절을 뜻한다.
그린 레터. 미 명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계획이었던 김모(30)씨. “미 대사관에서 10분 만에 녹색 종이를 건넸다. 지난해 촛불집회 참석을 문제 삼은 게 아닌가 싶었다.” 녹색 종이는 그린 레터다. 비자 발급 보류를 의미한다. 박씨와 김씨는 ‘다행히’ 비자 인터뷰 ‘재수’ 끝에 학기 시작 전인 지난 8월 미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비자 발급이 곧바로 안 되자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말했다.
이민단속으로 체포됐던 현대차-LG엔솔 배터리공장 건설 현장 직원들이 애틀란타 공항으로 향하기 위해 지난달 11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포크스턴의 이민세관단속국(ICE) 구금시설을 나서며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체포·구금됐다. 비자 조건 위반이 이유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하자마자 내건 ‘미국 우선주의 정책 과제’ 중 첫 번째가 이민 통제 및 국경 보안 강화였다. 트럼프 2기. 미국은 비자를 외교전의 최전방에 배치했다. 관세 전쟁 와중의 비자 전쟁이자 관세 전쟁을 겸한 비자 전쟁이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5월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공격적인 비자 취소” 방침을 내세웠다. 그런데 중국과 관세 전쟁 휴전에 돌입한 지난 8월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유학생을 60만 명까지 허용한다”며 180도 돌아섰다. 지난 1월 콜롬비아의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이 미국에서 보낸 '콜롬비아 불법 체류자 비행기' 착륙을 거부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50% 관세를 부과한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때 관세와 함께 꺼낸 카드가 관료는 물론 여당 지지자까지 이르는 '전면 비자 취소'였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이 관세 전쟁과 비자 전쟁을 연계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앞 광장에서 친 팔레스타인 시위에 참석해 군중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한 이유로 미국 비자가 취소돼 귀국했다. [AFP=연합뉴스]
루비오 장관의 발언 즈음 주한 미 대사관도 유학생 비자 발급을 전면 중단했다. 그러다 “SNS 계정을 전면 공개하라”며 발급을 재개했다. 정치 성향과 반미 활동을 본다는 것. 앞서 김씨가 “촛불집회 때문 아니냐”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 당국이 외국인의 정치 성향과 반미 활동을 들여다본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민석 국무총리와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한때 미국 비자를 받지 못했다. 1980년대 반미 활동이 이유라는 것이었다. 지난 4월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스카르 아리아스(84) 전 코스타리카 대통령도,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현직인' 페트로 콤롬비아 대통령도 트럼프를 비판했다가 비자가 돌연 취소됐다. 사실상의 추방. ‘레드 카드’였다.
미국 이민당국에 의해 조지아주에 구금됐던 한국인 근로자들이 12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한 뒤 주차장에서 가족과 만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미국은 또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북한·예멘·이라크·이란·쿠바 등을 2011년 이후 방문한 경력이 있으면 비자 면제프로그램(VWP)에서 제외한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 방북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가수 조용필, 걸그룹 ‘레드 벨벳’ 등이 대상이라 떠들썩했다. 미 비자 전문가인 김철기 법무법인 한미 대표변호사는 "미국은 잠재적인 테러 위협에 대비하고 국가 정책을 보호하기 위해 최근 SNS 계정 공개를 더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미국대사관 앞에서 시민들이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줄 서 있다. [뉴스1]
실제로 올해 한국인의 미국 비이민 비자 3대 축인 B-1/B-2(상용관광)·F-1(학생)·J-1(교환방문)의 발급 건수가 급감했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 3~5월 792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만1059건의 72% 수준이다. J-1 비자를 받은 남편을 따라 J-2(배우자) 비자로 미국에 간 허모(35)씨는 “비자 인터뷰 전 단계인 DS-2019(입학허가서)부터 7개월이나 걸렸다”며 “올해 들어 그린 레터가 쏟아지면서 미 대학들도 눈치를 보는 것 같더라”고 전했다.
특히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 체류 기간의 두 배인 6개월을 머물 수 있는 B-1/B-2는 37%나 빠졌다. B-1/B-2 비자는 ESTA와 함께 조지아에서 체포된 한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소지하고 있었다. 국내의 한 비자 전문가는 “미국의 B-1/B-2 발급이 한국인 근로자 체포 전부터 현저히 줄어든 건 일종의 전조 현상으로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며 “현장과 비자 목적이 일치하지 않은 관행을 눈여겨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미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한 '비자 워킹그룹' 첫 회의가 열리고 있다. 외교부는 지난 1일 ″이 회의를 통해 B-1 비자로도 미국 투자와 관련한 해외 구매 장비의 설치, 점검, 보수가 가능하다고 확인했고, 전자여행허가(ESTA)로도 B-1 비자 소지자와 동일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외교부]
국회입법조사처는 '조지아 사태' 직후 긴급 보고서를 통해 “트럼프는 (지난해) 대선 공약으로 이민 정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고, 이미 5~6월엔 LG엔솔과 현대차 소속 한국인 근로자의 미국 입국이 계속 거부되기도 했는데, 지난 7월 한·미 관세협상 등에서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다”면서 "H-1B 쿼터 확보와 한국인 전용 비자(E-4) 신설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아울러 해석이 모호한 B-1 비자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확정하라고 제시했다. 지난 1일 외교부가 B-1 비자와 ESTA로 대미 투자와 관련한 동일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미국 측과 확인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이유다. 전문가들은 현재로써는 E-2(투자)와 H-1B(전문직)가 적합한 비자라는 의견이다.
E-4 비자는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인 '한국 동반자법(PWKA)'에 담긴 것으로, 연간 1만5000건 이내의 전용 취업비자를 발급한다는 내용이다. 한국 정부도 2013년부터 미 의회와 행정부를 상대로 설득 작업을 벌였지만. 법안 논의는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로비 활동에만 550만 달러(약 76억원)를 투입했다는 설이 있다.
피터 와이클린 전 미 연방의원협회(FMC)회장이 19일 국회 외교통일일위원회 주최로 열린 '한미 경제 동맹 발전을 위한 정책 논의 - E-4 비자 신설에 대한 필요 및 실효성 토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는 국회 외통위원과 전 미 연방의원협회(FMC), 미국 이민 및 비자 관련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H-1B의 경우, 미국은 연간 발급을 8만5000건으로 고정해 놨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싱가포르(연 5400명)와 칠레(연 1400명)는 H-1B 별도 쿼터를 확보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미국과 FTA를 체결했지만 쿼터는 없다. 재발급을 포함해 지난해 H-1B를 발급받은 전 세계 39만9395명 중 한국인은 1%인 3983명에 불과하다. 올 1~5월 발급은 지난해 대비 17.5%나 줄었다.
당초 유학생 김씨는 F-1을 신청하고, 현지에서 취업할 수 있는 F-1 OPT로 갈아탄 뒤 H-1B를 취득하려고 했다. 국내 비자 전문 대행사의 한 관계자는 “이는 영주권과 시민권을 따기 위한 전형적인 수순”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지난달 19일 트럼프 대통령이 H-1B 발급 수수료를 연간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로 100배 올리자 김씨는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토로했다. 미국은 또 비자 없이도 미국 입국이 가능한 ESTA 수수료도 2배 가까운 40달러(약 5만6000원)로 인상했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비자 승인 비율도 뚝 떨어졌다. 미 연방이민국(USCIS)에 따르면 지난 1~3월 비자 발급 신청은 총 388만 건. 이 중 239만 건(61.6%)이 승인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83.9%(347만 건 중 291만 건 승인)보다 22.3%포인트나 줄었다. 그런데 거절 비율은 9.4%에서 6.3%로 더 떨어졌다. 보류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김철기 변호사는 “승인율 감소, 보류 비율 증가는 인터뷰의 세분화와 장기화, SNS 등 사생활 영역 검증 강화 등으로 행정 절차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며 “코로나 이후 비자 수요 증가, 공무원 감축 정책에 따른 행정 공백도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강경화 주미대사가 지난 4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부임 소감을 밝히고 있다. 강 대사는 ″어려운 난제들이 꼬여 있는 만큼 공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한미 간 문제들이 잘 풀릴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강 대사는 선결 과제로 한국 근로자 비자 문제와 무역 합의 후속 협상을 꼽았다. [뉴스1]
높은 장벽을 통한 미국의 비자·이민 정책은 140년 전에도 있었다. 1882년. 미국은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을 만들고 비자로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을 막았다. 자국민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당시 중국인은 숙련된 저임금 노동자로, 미국 서부 철도 부설과 광산 개발의 '공신'이었다. 이 법으로 중국인은 감소했지만, 문제는 다음이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중국인 배제법 입법 전후로 중국인 노동자가 64% 빠진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제조업이 침체하고 백인 노동자까지 28% 줄면서 저임금을 받게 됐다. 이 법은 1943년까지 이어졌는데, 결과는 미국 경제 침체와 '차별 국가'라는 국제적 낙인이었다.
한국인의 미국 입국 문턱은 앞으로도 계속 높아질까. 김 변호사는 “트럼프는 관세와 투자·반이민 정책의 혼란 속 여론의 지지 등 얻고 싶은 걸 얻어 나갈 것”이라며 “H-1B 비자의 경우 문턱을 오히려 높여 최상위 인재 유치에 집중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장 연구위원은 “트럼프도 외국 인력 없이는 미국 내 산업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외국인 대신 내국인으로 채울 수 있다고 보고 지금의 비자 정책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