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조력사 선택한 ‘82년생 나르시시스트’
특정 세대의 기억을 소환하며, 40대에 강하게 소구하는 드라마에서 조력사를 등장시킨다. 이는 40대에 닥쳐올 미래의 돌봄 문제를 환기한다. 또한 강렬한 여성 서사의 틈새에 트랜스젠더를 끼워 넣는다. 현재의 여성주의 자장 안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견해 차가 이슈를 발생시키는 것을 고려하면, 진취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은중과 상연’의 가장 독보적인 지점은 상연의 성격이다. 상연 행동의 이유는 결국 성격 비극인데, 이는 최근 늘고 있는 나르시시스트 논의와 맞물린다.

‘은중과 상연’은 두 여자의 30년 애증을 그린 드라마다. 스타일과 감성이 섬세하고 예민하며 농밀하다.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는데, 특히 상연 역을 맡은 박지현의, 세월에 따라 변하는 서늘하고 음울하고 초췌한 얼굴은 생생한 통증을 유발한다.
드라마는 논쟁적인 키워드를 던진다. 특정 세대의 기억을 소환하며, 40대에 강하게 소구하는 드라마에서 조력사를 등장시킨다. 이는 40대에 닥쳐올 미래의 돌봄 문제를 환기한다. 또한 강렬한 여성 서사의 틈새에 트랜스젠더를 끼워 넣는다. 현재의 여성주의 자장 안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견해 차가 이슈를 발생시키는 것을 고려하면, 진취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은중과 상연’의 가장 독보적인 지점은 상연의 성격이다. 상연 행동의 이유는 결국 성격 비극인데, 이는 최근 늘고 있는 나르시시스트 논의와 맞물린다.
40대의 신도시, 씨네필, 조력사
드라마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40대가 된 은중(김고은)이 화자가 되어 상연을 만난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1982년생인 두 사람은 신도시가 막 들어서던 1992년에 경기도의 초등학교에서 만났다. 하루 12명이 전학 오던 교실에, 상연이 서울에서 전학 온다. 좁은 골목에서 홀어머니와 사는 은중에게 새 아파트 거실에 걸린 4인 가족사진 속 상연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상연의 전학으로 헤어진 두 사람은 중학교에서 다시 만나 친구가 된다. 중3 때는 대학생인 천상학(상연의 오빠)에게 같이 과외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천상학이 죽고, 상연네가 갑자기 이사하면서 둘은 헤어진다. 이후 둘은 대학 동아리 선후배로 재회한다.

드라마는 대학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2000년대 초 한국영화 산업이 막 부흥하던 시절의 ‘씨네필’(영화광) 감성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천상학과 김상학이 익명으로 활동하던 1990년대 중후반 피시(PC)통신 시절 동호회의 아스라한 기억을 소환한다. 2002년 월드컵 응원 장면을 집체극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열광하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다른 생각에 빠진 개인’으로 추억함으로써, 그 시대를 살았던 구체적인 개인들에게 ‘이것은 나와 당신의 이야기’임을 내밀하게 속삭인다.
‘82년생 김지영’ ‘벌새’ ‘은중과 상연’은 1980년대에 태어나서 1990년대에 유년을 보낸 여자들의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서사이다. ‘은중과 상연’에서는 이제 그 주체의 죽음을 다루는데, 그것이 조력사다. 상연은 이혼했고 불임이었다. 물론 상연이 조력사를 택한 이유가 자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는 아니다. 그는 오빠의 외로운 자살과 엄마의 말기 암 환자로서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아닌 길을 원했다. 3개월밖에 삶이 남지 않았지만, 나의 인격과 품위가 남아 있을 때, 나답게 죽고 싶어서 스위스행을 택했으며, 자신에게 제3의 선택지가 있음에 감사하다고 했다. 현재 스위스에서 조력사를 택한 한국인은 10여명이며, 약 300명이 관련 단체에 가입해 있다. 현재 한국인의 약 82%가 조력사에 찬성 중인데, 인구절벽과 맞물려 40대가 본격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질 전망이다.

여성 서사, 트랜스젠더
드라마는 도입부에 미리 연막을 깐다. “사실 별사건이 없다. 그냥 여자애 둘이 지지고 볶다가 절교했다 하는 이야기다.” 드라마는 사건이 아닌 캐릭터에 집중한다. 두 여자를 ‘입체적인 욕망과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간’으로 그렸기에 특별해진다. ‘은중과 상연’을 거칠게 보면, 친구 남자 빼앗는 통속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은 대학에서 김상학을 두고 경쟁하는 것도 모자라, 30대에 셋이 영화판에서 재회한다. 더욱이 김상학과 상연의 숨은 서사도 만만치가 않다. 꽤 흥미진진한 삼각관계가 될 수 있는 구도인데, 여느 막장극과 달리 여자들이 잘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주체성을 잃는 것으로 그리지 않았다. 뭐가 다른 걸까. 물론 처음부터 상연이 성공한 영화 제작자이고, 은중도 현역 드라마 작가이기에, 두 여자가 남자에게 의존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또한, 여배우들보다 인지도가 낮은 남자배우를 캐스팅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카메라와 장면 연출을 통해 김상학을 돋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카메라는 시종 은중과 상연에게 초점을 맞추고 김상학을 배경으로 처리했으며, 서사는 은중과 상연 사이의 긴장과 감정의 폭발을 따라가며 구성했다. 이렇게 하고 나니, 여자들 사이의 감정이 훨씬 짙게 느껴진다. 그 결과 김상학은 꽤 괜찮고 아까운 남자이긴 하지만, 활활 불타는 독특하고 입체적인 욕망을 지닌 인간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것은 그동안 남성 서사에 끼어 있는, 애정의 대상이 되는 참한 여자 캐릭터가 그려지던 방식이다. 일종의 젠더 역전이다.
궁중 사극이나 재벌 막장극 등 여자들 간 남자 뺏기 암투극의 기본 전제는 남자가 권력을 쥔 주체이고, 여자는 그 권력에 애정으로 빌붙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에게 권력이 없다면, 남자 뺏기 서사의 판본도 달라져야 한다. 남자가 필수재가 아닌 사치재인 시대에, 여성 서사에서 남자 주인공의 비중은 훨씬 줄어야 한다.

천상학의 죽음의 비밀은 느닷없는 반전이 아니다. 암시가 꽤 있었다. 아버지가 왜 서울대 다니는 잘난 아들을 군대나 가버리라며 때렸겠나. 그의 필명 ‘무니’는 홍콩 여배우 이름 막문위(모원웨이)에서 따온 것이다. 막문위는 영화 ‘서유기’에서 백정정 역할을 맡았다. 백정정은 본래 백골 요괴지만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주성치(저우싱츠)가 연기한 손오공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백정정은 일찍 죽고, 손오공이 50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도 사랑은 어긋난다. 천상학의 이중적 정체성이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은유다. 관객은 아름다운 청년 천상학이 왜 일기장에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에 연서를 가득 쓸 수밖에 없었는지, 처음 여장하고 외출했을 때 얼마나 타인의 시선이 두려웠으며 ‘딜런’이 편히 대했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입대를 앞두고는 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 천천히 곱씹게 된다. 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위화감)를 풀어서 숙고하는 것이다. 흔히 트랜스젠더를 재현할 때, 과잉 성애화된 여성 이미지로 소비하곤 한다. 그러나 ‘은중과 상연’은 트랜스젠더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염세와 고독을 공감하게 한다.
나르시시스트와 피해자들
혹자는 상연이 이해되지 않기에, 드라마 전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을 느낀다. 2013년 미국정신의학회가 진단 체계를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5판’(DSM-5)으로 개편하면서, 기존보다 인격장애 진단이 세밀하게 강화되었다. 이에 앞서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범주에 넣을지 상당한 논쟁이 있었는데, 결국 공식 진단 범주에 포함했다. 이후 병적 나르시시스트와 피해자들에 관한 책들이 쏟아지고, 대중적인 온라인 자료가 급증하였다. 나르시시스트는 대략 인구의 1~6%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중문화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 그리고 개인들 간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문화는 자기애적 성향을 부추긴다. 그 결과 나르시시스트들이 더 자주 더 뚜렷이 눈에 띄게 되었다.
상연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은중과 애증의 관계를 이어간 것도, 상연이 나르시시스트이고 은중이 그의 먹잇감인 ‘에코이스트’(배려-장이)였다고 보면 전형적이다. 상연은 엄마를 왜 그토록 원망했을까. 엄마가 자신보다 오빠를 더 사랑했다거나, 오빠와 엄마가 은중을 좀 챙긴 것이 그렇게 질투할 일인가. 일반적으론 이해되지 않지만, 상연이 나르시시스트라면 말이 된다. 나르시시스트는 모든 관심이 나에게 쏠리지 않으면 분노한다. 엄마의 단 한번 꾸중에 평생 수치심을 호소하며, “당신은 엄마도 아니다”라며 소리친다.

초등학생 상연은 공감 능력이 없어 보였다. 은중이 공감 능력을 보이자, 오히려 그걸 질투한다. 중학생 상연이 갑자기 은중에게 다가온 건 은중이 자신을 선망하고 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채워줄 ‘서플라이’(공급원)로 은중을 낙점한 것이다. 그런데 오빠랑 엄마가 은중을 예뻐하자 분노가 치민다. 대학생 은중과 다투는 상연을 보라. 은중이 김상학과의 관계를 추궁하자, “내 일기장 봤지?”라고 역공을 펴고, 은중이 호의로 보낸 월세에 자존심이 상했다며 악담을 퍼붓는다.
30대의 상연은 드디어 공감을 연기해 사회생활에 이용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되었다. 모든 관계를 서열화하며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하다. 처연한 표정으로 “나에겐 아무도 없다”며 약자 코스프레를 하다가, “나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며 큰소리치더니, 작품을 ‘도둑질’한다. 표절이나 성과 가로채기는 나르시시스트의 특기다. 그리곤 40대에 뻔뻔하게 다시 나타난다. 떠들썩하게 사과하고, 과한 선물 공세(‘러브 바밍’)를 펴며, “네가 나를 받아주는구나, 끝내”라 말한다. 나르시시스트가 헤어진 상대를 이전 관계로 끌어들이려 감정 조작하는 행태를 ‘후버링’이라 한다. 나르시시스트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기 때문에, 주로 외롭게 죽는다. 그런데 상연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내심 존경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써줄 은중을 ‘후버링’하여, 조력사의 관객으로 동행시키다니! 과연 최고의 나르시시스트이자, 흥행 제작자다운 죽음이다. 유 윈!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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