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우리가 알던 미국’이라는 착각
한국도 같은 전철 밟을 수 있어
자국 이익 강요는 강대국 본질
결기 품고 협상해 자강의 길 가야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한미 관세 협상 교착의 이유가 드러난다. 한미는 지난 7월 말 관세 협상 타결 당시 구두 합의를 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펀드에 대해 한국은 대출이나 보증 중심의 간접 투자로 이해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서면 합의 없이도 구두 합의가 충분히 견고하다’며 자신했다. 하지만 이후 후속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이를 대부분 현금 투자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각자 유리한 대로 해석한 ‘동상이몽’을 합의라 믿었던 것이다. ‘협상’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의 치명적인 오해다.
미국이 이제 와 딴소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정부 관계자들도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라고 한다. 비망록을 작성했다지만, 구두 합의의 위험성을 인지하고도 핵심 쟁점을 서면으로 명확히 하지 못한 것은 실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던’이라는 인식은 결과적으론 안일함이었다. 국익이 걸린 냉혹한 협상 테이블에서 “동맹국인 미국이 설마…”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일까. 자국의 이익이 절대 우선인 국제 협상 무대에서, 그것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인 미국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했다면 우리는 상대를 제대로 모른 것이다.
세계 교역사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많은 나라들이 남긴 뼈아픈 궤적이 점철돼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일본의 경험이 말해준다. ‘메이드 인 재팬’이 미국 시장을 휩쓸자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강제해 엔화 가치를 2년 만에 2배로 폭등시켰다. 수출길이 막힌 일본은 자산 거품으로 활로를 찾았고 그 결과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던 일본의 싹을 잘라버렸다. 당시 일본 청년들은 정규직을 얻지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렸다. 은둔형 외톨이 같은 포기자들이 쏟아졌다. 미국과 협상 한 번이 한 세대의 삶을 바꾼 셈이다.
일본은 그래도 버텼다. 세계 최대 채권국이었고 제조업 기술력과 자본 축적이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0년 만에 일본은 다시 미국에 등 떠밀려 5500억달러, 천문학적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일본의 한 전문가는 “버틸 만하니까”라고 말했다.
한미 관세 협상에선 미국의 민낯도 드러났지만 한국의 빈약한 내공도 노출됐다. 외환과 금융의 허약한 경쟁력, 그리고 과도한 미국 의존적 수출 구조까지,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 경제의 얕은 뿌리가 드러난 것이다. 3500억달러 요구 중 우리가 현금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200억달러 미만으로 보인다. 당초 우리 정부가 생각한 현금 지분 5%가 딱 그 수준이다. 한미 간 무제한 통화 스와프가 체결된다면 그보다 올라가겠지만 일본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알던 미국’이라는 헛된 기대는 접고 단호한 결기와 전략으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자강(自强)하지 못하면 그 어떤 동맹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냉철한 자각이 그 결기를 받쳐줘야 한다. 미국을 바꿀 힘이 없다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할 쪽은 한국이다. 일본은 버텼다면 한국은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권력을 쥔 쪽은 산업과 금융의 내공을 키우는 자강의 길 대신, 권력 사유화와 표심을 의식한 포퓰리즘 정책에 매몰된 모습이다. 기업을 옥죄는 반(反)시장 입법, 재정 건전성을 해치는 선심성 지출, 산업 경쟁력 강화보다 분배 구호에 매달리고 있다. 미국의 압박에 “놀랍다”고 하면서도 ‘굴욕은 협상단 몫’이란 식으로 권력 다툼에만 몰두하는 건 대책 없는 무책임이다. 이렇게 가다간, 오늘이 우리가 제일 잘사는 날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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