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의 난관…왜 구글에 안 물어봤을까? [크리틱]

한겨레 2025. 10. 2.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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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추리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차를 마시러 친구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현재', 21세기는 추리소설에 매우 곤란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원한 현재가 지금은 추리소설에 너무나 적대적인 환경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과거 몇년도라고 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콩 작가 찬호께이는 '망내인'(2017)에서 인터넷 시대에도 추리소설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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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에번스에게 안 물어봤을까?” 1934년 초판 표지. 제목은 사망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위키피디아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영국 추리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차를 마시러 친구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집에 있던 친구 남동생은 읽던 책을 치우면서 혼잣말했다. “나쁘진 않은데, 왜 그들이 에번스한테는 안 물어본 거지?” 크리스티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듣자마자 다음번 소설 제목을 그리하기로 정한 것이다. ‘왜 그들은 에번스에게 안 물어봤을까?’는 1934년 출간되었다. 크리스티가 쓴 81권의 책 중 물음표가 들어간 제목은 두개뿐이다.

친구 남동생이 읽던 책이 뭐였는지 지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게 추리소설이었다면 ‘그들이 에번스에게 물어보지 않은 이유’는 알기 쉽다. 에번스에게 물어보는 순간 미스터리가 풀리기 때문에 물어볼 수 없는 것이다. 300페이지까지 가야 하는데 20페이지에서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대개 추리작가들은 미스터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에번스처럼 뭔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입을 일일이 봉해 놓고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수로 한두명 빠뜨리면 저런 구멍이 생긴다.

몇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추리소설 서평을 쓰고 있다. 그동안 점점 뚜렷해지는 것이 있다. ‘현재’, 21세기는 추리소설에 매우 곤란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많은 비밀과 속임수가 핸드폰과 인터넷 덕분에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것이 돼 버렸다. 예컨대 남편의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여자가 100페이지가 넘도록 손톱만 뜯고 있다면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왜 구글에 안 넣어 보는 거야? 회사 이름이라든가, 학교라든가….”

구글이 없는 척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구글 덕분에 우리는 아는 것도 없지만 모르는 것도 없는, ‘전지(全知) 1초 전’ 상태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과잉 정보화 사회에서 미스터리의 입지는 한없이 좁을 수밖에 없다. 어떤 작가들은 차라리 인터넷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일본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추상오단장’(2009)에는, 자기 아버지가 20년 전에 이름 모를 잡지에 투고한 단편소설들을 찾아달라는 의뢰인이 등장한다. 과거를 파헤치는 미스터리인데, 그 ‘현재’조차 21세기가 아닌 1990년대 초로 설정되었다. 인터넷 보급 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한두개도 아니고, 일시적인 것도 아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전체가 슬며시 20세기 역사소설로 변하는 중이다. 눈에 띄는 징후 중 하나는 연도를 표시하는 경향이다. 원래 추리소설의 탐정들은 수십년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 존재였다. 그들은 굳이 연도를 알 필요가 없는 ‘영원한 현재’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 영원한 현재가 지금은 추리소설에 너무나 적대적인 환경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과거 몇년도라고 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를 정공법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도 있다. 홍콩 작가 찬호께이는 ‘망내인’(2017)에서 인터넷 시대에도 추리소설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컴퓨터는 작가의 전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공 해커의 현란한 활약을 간신히 따라가는 독자들은 궁금해진다. 내가 직관을 발휘할 기회가 있을까?

옛날 탐정들은 모두 비현실적 천재들이었다. 그러나 독자와 그들의 간격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탐정의 논리와 독자의 직관은 같은 범인을 지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등했다. 그렇게 민주적이었던 추리소설이 현재를 못 견디고 철수하고 있다. 대중의 직관을 긍정했던 세계관이 함께 퇴장하고 있다. 어쩌면 독자도 추리소설을 서부극 같은 역사소설로 받아들인 지 오래됐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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