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수해 후 첫 명절 맞는 산청] 집 잃고 웃음 잃은 주민들, 씁쓸한 한가위
재건까지 인근 숙박업소서 생활
“자식·손주 와도 잘곳 없어” 한숨
산사태 덮친 내수마을 주민
집 없어 가족 상봉 못해
흙·모래 뒤덮인 논
수확철에도 손 못써 시름
화마 휩쓴 외공마을 주민
통째 불탄 집, 재준공 앞둬
“추석 전 일상 되찾아 안도”
“마을이 다시 지어져서 죽기 전에 딱 하루만이라도 집에서 살고 싶어요.”
올해 봄과 여름 대형 산불(3월)과 수해(7월)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산청군의 수재민들이 명절을 앞두고 있다. 고향을 찾는 가족들을 맞을 준비에 분주함과 웃음이 넘쳐야 할 마을이 재해로 일상을 빼앗기면서 올해 추석은 상봉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두 차례 재난을 현장에서 지켜본 기자는 여느 때와 다르게 생기를 잃어버린 모습으로 추석을 맞는 이재민들을 찾았다.
산청군 생비량면의 한 숙박업소에는 산사태로 마을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상능마을 주민 11명이 머물고 있다. 읍내와 멀찍이 떨어져 있어 주변에 상점 하나 없는 숙박업소엔 삭막함이 맴돈다.


지난달 29일 오후에 만난 수재민들은 밭을 일구며 함께 노닐던 일상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토로하며, 가족이 머물다 갈 집이 없어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상능마을 주민 선향월(86) 어르신과 이상순(89) 어르신은 객실에 앉아 햇밤을 까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선씨는 “마을에 있을 때는 밭에서 고구마와 감자, 감나무와 밤나무를 가꾸며 살았는데 마을이 사라지면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여기에만 있으려니 갑갑하다. 할 일이 없어 하루 종일 객실에서 누워 있다가 멍하니 앉아 있기를 반복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며 하소연했다.

올해 설날에만 하더라도 마을을 찾은 자식들과 손자를 맞았던 선씨는 이번 추석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다. 그는 “네 딸과 아들 하나에 손주들까지 합쳐 20명이 넘는 가족이 명절마다 모였으나, 지금은 찾아와도 잘 데도 없고 함께 밥을 차려 먹을 여건조차 안 되니 이번 추석은 그냥 넘기려고 한다”며 “직접 자식들 집에 찾아가자니 고령의 몸으로 먼 길을 나서기가 쉽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한시바삐 마을로 돌아가 일상을 찾고 싶은 심정을 토로했다. 경남도는 지난달 붕괴된 상능마을을 현재 위치에서 800m가량 떨어진 곳에 새롭게 조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구순을 한 해 앞둔 이상순씨는 “마을을 새로 짓는 데까지 길면 3년 가까이 걸릴 수 있다고 통보받았는데, 그때까지 기력이 있을지나 모르겠다”며 “마을이 하루빨리 다시 지어져 하루만이라도 내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산청군에 따르면 지난 7월 닷새 동안 내린 793.5㎜의 비로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주민은 지난달 23일 기준 195명이며, 3월에 닥쳤던 대형산불로 인한 이재민은 21명이다.

이날 찾은 산청읍 내수마을. 이곳은 올여름 산사태가 마을을 덮쳐 집 4채가 완파됐다. 그중 한 집에 살던 양길순(77)씨는 그날 이후 두 달 넘게 마을회관과 컨테이너로 지은 집을 오가며 살고 있다. 두 평 남짓한 컨테이너엔 선풍기와 부탄가스 버너 등의 생활용품이 놓여 있다.
양씨는 “낮에는 주로 컨테이너에서 끼니를 때우고, 저녁에는 회관에서 마을 주민들이 모여 같이 밥을 지어 먹기도 한다”며 “잠은 주로 회관에서 자는데, 내 집이 아니니 잠자리나 화장실 등 불편한 구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했다.

또 양씨는 올 명절엔 가족과의 상봉을 누리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4남매에 손주들까지 바글바글한 아이들이 명절이면 찾아왔는데, 올해는 집이 없으니 그러지 못한다”며 “산사태에 남편 산소도 떠내려가서 명절다운 명절을 보낼 수가 없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산청에도 추석과 함께 추수의 시기가 왔다. 내수마을 앞 개울을 따라 길게 이어진 논에서도 벼가 노랗게 익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논 대부분이 산사태가 몰고 온 흙과 모래가 뒤덮여 있었고, 한쪽엔 휩쓸려 온 나무들이 누워 있었다. 수확할 시기임에도 아수라장으로 남아 있는 논을 보며 농민은 시름한다.
마을 주민 서모(53)씨는 “일주일쯤 후면 딱 추수할 시기인데도 논이 흙으로 덮여 농기계를 쓸 수 없으니 손을 못 쓰고 있다”며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고령이라 논을 치우거나 기계 없이 수확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고 했다.
도로와 산에도 재해의 흔적이 여전했다. 하천가 보호난간은 휘어져 있었고, 전봇대는 옆으로 누웠다. 또 산비탈마다 산사태로 누렇게 흙이 흘러내린 자국이나 산불로 새까맣게 탄 나무들이 보였다.

지난 3월 화마가 다녀간 후 여전히 군데군데 그을린 흔적이 남은 시천면 외공마을. 당시 집이 통째로 불탔다가 재준공 후 입주를 하루 앞둔 하모(65)씨는 추석 전에 일상을 되찾았다며 안도했다.
하씨는 “명절 때면 늘 6남매와 조카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며 정겹게 보냈는데 올해는 그러지 못할까 걱정했다”며 “다행히 예정대로 추석 전에 준공이 돼 가족들을 맞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마을 주민 김수야(89)씨도 지난달 15일, 산불 이후로 반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평생 살던 마을을 떠나 반년 가까이 집 밖에서 생활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며 “시커먼 불이 마을을 덮칠 때가 아직 생생하지만, 집에 돌아오니 몸도 마음도 편안한 채로 명절을 맞게 됐다”고 했다.
진휘준 기자 geni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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