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 韓 독립운동 역사 잇는 법정 스토리 해외편 시작

박경호 2025. 10. 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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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도쿄·中 상하이 관련 현장 찾아
‘2·8독립선언’ 등 새 관점 재조명
잊혀진 현장 지키는 인물도 만나

1932년 4월29일 아침 중국 상하이 황푸구 옌당로 공동주택에 있는 김해산(김정묵·1888~1944)의 집에서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1908~1932)은 단장인 백범 김구(1876~1949)와 마지막 식사를 한다. 이곳에서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전달받고, 거리로 나와 조금 걷다가 택시를 타고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으로 향한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그날 윤봉길은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제 전승기념식 현장에서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932) 일본 육군 대장을 비롯한 일제 주요 인사들을 처단했다. 이른바 ‘훙커우공원 의거’는 일제의 대륙 침략과 식민지 체제를 뒤흔드는 국제적 사건이었다.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지난달 9일 아침 중국 상하이 현지에서 윤봉길이 김해산의 집에 들러 김구와 아침 식사를 한 후 택시를 타고 훙커우공원으로 향한 그의 의거 직전 마지막 길을 따라갔다. 윤봉길은 거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그날 윤봉길이 김구와 작별하면서 “앞으로 몇 시간밖에 쓸 일이 없다”며 자신의 새로 산 회중시계를 김구의 낡은 회중시계와 맞바꾼 이유다.

취재팀은 현지에 가까스로 남아 있는 윤봉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그날 스물네살 청년 윤봉길이 느꼈을 걸음의 무게를 생각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으리라.

취재팀은 지난달 8일부터 14일까지 상하이, 일본 도쿄와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일대 독립운동 현장을 찾았다. 점점 잊혀 가는 해외 독립운동 현장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만났다. 지난 4월부터 시작한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시리즈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의 ‘국내편’을 끝마치고, 새 시리즈 ‘해외편’의 문을 연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국내 활동과 해외 활동을 딱 잘라 나누기 어렵다. 사실상 최초의 독립선언인 1919년 도쿄 2·8 독립선언은 당시 여운형(1886~1947)이 주도한 신한청년당 등 상하이 활동가들, 국내에서 3·1운동을 준비한 주요 인사들과의 협력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

기획 시리즈 ‘국내편’에서 다룬 3·1 만세시위 직후 여성들의 ‘이화학당 회동’(5월29일자 11면 보도)의 핵심 인물인 김마리아(1891~1944)는 앞서 도쿄 2·8 독립선언을 조력했다. ‘인천 중대사건’(9월4일자 11면 보도)의 윤응념(1896~?)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로서 국내 활동을 했다. 국내에서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의 법정 투쟁을 도운 일본인 변호사도 있었다. 그는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츠지(1880~1953)다.

취재팀은 해외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6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임시정부, 2·8 독립선언 등 주요 사건을 법정 투쟁의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기획 시리즈 ‘국내편’과 ‘해외편’을 연결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연대’가 독립운동 정신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음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그 발자취를 더듬는 첫 번째 여정은 도쿄에서 시작한다.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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