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유산] (18) 신돌석 장군 생가

뒤란 대나무 숲과 앞 뜰 호랑이가 초가집 두 채를 지키고 있었다. 장군의 부친 신석주가 1850년경에 지어 살던 집의 옛 모습이다. 일제가 1940년 불에 태워 없애버린 자리에 당시의 건물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一자형 초가로,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신돌석장군 1길 31, 이곳에서 태어난 신돌석(1978-1908)은 어린 시절부터 몸집이 다부지고 용감하기로 소문이 났다 한다. 과장된 것이겠지만, 담력이 뛰어나 수십 길의 언덕을 뛰어넘었다고도 하고, 어느 해 여름 청도를 지나다가 전신주를 뽑아 왜군 공병을 무찔렀다고도 하고, 왜군 배를 바위 위로 끌고 가 떨어뜨렸다는 일화도 전한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이 구국의 일념으로 집 떠나던 그 날을 상상해 본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노모는 밤새 뜬눈으로 기도를 올린다. 미래의 의병장 신돌석은 창과 화승총을 손질하고, 머리띠를 동여맨다. 낡은 짚신을 고쳐 신고, 허리에 칼을 매만지며 굳은 결심을 다진다.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너라. 장하다 우리 아들!" "아버지, 나라가 살아야 소자도 삽니다." 장군의 첫발은 그렇게 골목길을 벗어나 적진을 향했을 것이다. 집을 떠나는 길은 농민의 삶을 접고 의병장이 되는 길이었다. 개인적 고뇌와 민족적 사명의식이 교차하는 힘겨운 순간이었다. 마당 끝에서 서성이는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했겠는가. 바람은 산 너머에서 거칠게 불어오고, 들녘 억새는 몸을 눕혀 장군의 험난한 앞길을 열어주었겠다.

의병 초기엔 낫, 창, 활 등 전통 무기를 사용하다가 왜군과의 전투에서 총기, 탄약, 군수품 탈취, 이를 적극 활용했다. 소수 정예부대로 적의 허점을 빠르게 타격하는 기습전은 울진, 삼척, 봉화 등 산악지형을 활용한 매복과 야간기습에 최적화된 전략이었다. 왜군이 감당하기 힘든 소규모 유격전으로 보급로를 습격해 식량, 정보를 차단하고 무기와 자금이 집중된 군수품 보관소와 관공서를 습격함으로써 왜군에게 막다한 피해를 입혔다. 일제의 헌병사 보고서에 따르면 "신돌석은 특히 기습 전술에 능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아 무기 확보가 용이한 인물로 위협 1순위 의병장"으로 분류하고 있다. 포상금을 걸어 집요하게 추적한 배경이다.
태백산맥 준령 고래산 자락에 자리 잡은 신돌석장군 유적지는 생가에서 2km 떨어진 거리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하여 장군을 추모하는 유적지에는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처럼 호랑이 옷을 입은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 있고 실내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장군의 삶의 내력과 일제의 만행에 항쟁하던 의병 활동의 기록, 그리고 왜군의 무기와 형장구, 의병들이 사용하던 장도 화승총, 창검류 둥 유물 18점이 전시되어 있다. <신돌석 의병장 활동사> 등에 따르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부터 1908년 순국까지 장군의 의병활동 전개과정은 이렇다.
-의병 투쟁의 배경(1905년):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 운동이 확산된다. 국권 회복과 민족 자주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신돌석은 이 시기를 계기로 의병을 조직하고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다.
-초기 의병 조직과 봉기(1906년): 1906년 봄, 강원도와 경북 북부 일대를 중심으로 자체 의병부대인 신돌석 의진을 조직하고 울진, 평해, 영덕, 봉화, 삼척, 정선 등지에서 게릴라식 전투를 전개한다. 일본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연승하며, 일제에 큰 타격을 줌으로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져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다.
-전투 및 활동의 확대(1906~1907년): 치밀한 전략과 민심을 기반으로 관공서 습격, 일본군 무기 탈취, 친일 관리 응징, 일부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대파하고 무기와 군자금 확보하는 등 의병 활동을 본격화한다. 의진 규모도 수백 명 규모로 성장, 조직적으로 지휘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일제는 신돌석을 가장 위협적인 의병장 중 하나로 인식하고 집중 추적하기에 이른다.
-의병 탄압과 후퇴(1907~1908년): 1907년 정미7조약과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 이후 해산된 구 한국군 출신들이 의병에 합류, 전국 의병이 재정비된다. 일제는 대대적인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의병 탄압 강화한다. 타격을 입게 된 신돌석 의병은 산악지대 중심의 유격전으로 전환한다.
-암살과 순국(1908년): 1908년 11월 18일, 현상금을 탐한 내부 배신자의 밀고로 영덕 눌곡에서 피살당한다. 당시 나이 31세였다. 평민이 민족을 위해 싸운 전형적인 인물, 항일 정신의 본보기이자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장군에게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다.

登樓遊子却妄行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 채
可歎檀墟落木橫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男兒二七成何事 남아 스물일곱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
潛倚秋風感慨生 가을바람 불어오니 감개만 솟는구나
27세 나이에 나라를 걱정해 평해 월송정에 올라 우국충정의 마음을 읊었다는 장군의 시이다. 가을바람 속에 솟구치는 감개, "남아 스물일곱에 이룬 것이 무엇이냐"는 자기 성찰이 어찌 장군만의 것이겠는가. 번영된 조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후대가 가슴에 새겨야 할 아픈 질문이자 채찍이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내 나라를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갈 길을 잊은 나그네는 아닌지? 다시 장군이 의병의 첫발을 딛던 그날을 상상해 본다. 지켜야 할 가족과 지켜야할 나라 사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힘겨운 낮과 밤을 보냈겠는가. 의병의 결단은 단순한 출정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는 서원(誓願)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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