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위기 진단한 리처드 리브스 신작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 주목

곽성일 기자 2025. 10. 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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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남성상 붕괴 시대, 교육·돌봄·가족 역할 재편 통해 성평등 논의 확장 촉구
자살·고립·정신 건강 위기에 빠진 남성 현실과 정책적 해법 제시…‘레드셔팅’·육아휴직·HEAL 분야 남성 참여 강조
▲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 표지

소년과 남자들이 흔들리고 있다. 학교에서 뒤처지고, 일터에서 밀려나며, 관계와 가족 속에서도 고립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남성 자살률은 여성의 세 배에 달하고, 미국에서 자살 사망자의 80%는 남성이다. 45세 미만 영국 남성의 주요 사망 원인 역시 자살이다. 경제 구조의 변화와 사회적 고립, 불평등 심화가 맞물리면서 남성들은 점점 더 조용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진보는 남성성을 문제 삼고, 보수는 페미니즘을 비난할 뿐, 이 거대한 변화를 구조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계층과 기회 불평등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리처드 리브스는 신작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에서 이 불편하고도 절박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20 VS 80의 사회』에서 중상류층의 특권 대물림 구조를 드러냈던 그는 이번 책에서 불평등의 또 다른 축인 '남성'을 향한다. 출간 직후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 책은 남성 문제를 주요 담론으로 끌어올리며 성평등 논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리브스가 제시하는 데이터는 위기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에서는 자살자의 80%가 남성이고,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 사망자의 70%도 남성이다. 가까운 친구가 없다고 답한 미국 남성이 1990년 3%에서 최근 15%로 늘어났다. 외로움과 우울에 빠진 남성들은 극단적 온라인 공간으로 몰려들고,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이라는 낙인은 문제 해결 대신 비난의 도구로 쓰인다.

2025년 7월, 개빈 뉴섬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소년과 남성을 지원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너무 많은 젊은 남성과 소년이 공동체와 가족에서 단절된 채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특정 국가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남성의 자살률은 여성보다 월등히 높고, 외로움과 정신 건강 문제는 심각한 사회 과제가 되었다.

남성 위기를 둘러싼 정치의 대응은 양극화되어 있다. 2022년 한국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하며 젊은 남성층의 지지를 얻었고, 이재명 대통령도 "남성이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영역에 대한 공식 논의가 없다"며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성평등 논의는 여성 중심 프레임에 머물러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2021년 만든 성 정책 위원회는 이름과 달리 여성과 소녀 정책에 초점을 맞췄고,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폐지했다.

리브스는 좌파가 성 불평등이 양방향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외면하고, 우파가 과거의 전통적 남성성 회복만을 해법으로 제시하는 현실을 모두 비판한다. "남성을 돕는 유일한 방법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큰 착각"이라는 것이다.

책은 구체적 해법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것이 '레드셔팅(redshirting)'이다. 남학생의 뇌 발달이 여학생보다 늦게 진행된다는 신경과학적 연구를 근거로, 1년 늦게 학교에 입학시키자는 제안이다. 실제로 이를 적용한 남학생들은 학업 성취도와 삶의 만족도가 높고 과잉행동도 줄었다. 교육 현장의 성별 격차를 완화할 수 있는 정책적 실험이다.

또한 리브스는 낡은 '가장 모델'에 매달리는 남성들에게도 변화를 촉구한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 남성의 전통적 역할은 의미를 잃었고, 아버지의 역할도 '부양자'에서 '돌봄자'로 확장돼야 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동등한 자녀 양육권과 '쓰지 않으면 소멸되는' 유급 육아휴직 6개월을 부여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가족 내 역할을 재편하는 것일 뿐 아니라 남성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시도다.

책은 돌봄과 교육, 심리 지원 분야에서 남성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 초·중·고 교사 가운데 남성 비율은 1980년대 초 33%에서 현재 24%로 줄었고, 사회복지사와 심리학자 중 남성도 20% 남짓이다. 남성 상담사가 드물수록 남성들이 정신 건강 지원을 받을 가능성도 낮아진다.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서 여성 비율을 늘리기 위한 투자가 활발한 것처럼, HEAL(건강·교육·행정·문해력) 분야에 남성을 유입하기 위한 정책도 필요하다. 리브스는 "한 개의 STEM 일자리가 생길 때 세 개의 HEAL 일자리가 생긴다"며 남성 돌봄 전문인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리브스는 "페미니즘의 문제는 너무 멀리 간 것이 아니라 아직 충분히 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수천 년간의 억압을 딛고 사회 전반에서 성취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성평등을 완성하려면 이제 남성의 결핍을 메우는 방향으로 논의가 확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년과 남자들은 사회로부터 버려졌다는 감각에 휩싸여 극단적 선택이나 퇴행적 이념에 끌려갈 위험이 크다.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는 단순히 남성의 위기를 진단하는 책이 아니다. 남성성을 개조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로 바라보며, 새로운 역할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을 모색한다. 전통적 남성상이 무너진 시대, 소년과 남자들이 어디에 서야 할지를 묻는 이 책은 성평등 담론을 한 단계 더 앞으로 밀어붙인다. 여성 문제 이후, 이제 남성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