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 경쟁 속 생태학적 위기 [전문가 리포트]

한겨레 2025. 10. 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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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23일 공사가 진행 중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 부지 모습. 연합뉴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 온 삼성전자가 반도체 기술력은 물론 시장 점유율에서 처음으로 세계 1위에 오른 것은 1993년의 일이다. 미국과 일본의 경쟁사들보다 한 해 앞서 세계 최초로 64메가 디(D)램을 개발하면서다. 반도체 개발 초기 단계에서 개발은 곧 생산으로 이어졌다. 국가가 전력, 용수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고, 이들 자원이 지금처럼 막대한 수준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삼성전자는 이때부터 30년가량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최근 2∼3년간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반도체(HBM)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삼성전자의 독주체제는 깨졌다. 그 자리를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파고들었다. 고대역폭메모리반도체 개발에 선제적으로 나선 에스케이하이닉스는 현재 에이치비엠 시장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다만, 최근 삼성전자의 5세대 에이치비엠(HBM3E)이 인공지능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의 제품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고부가가치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이들 기업의 경쟁은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그런데 최근 반도체 산업에 밀어닥치는 도전은 조직적 차원을 넘어 생태학적이라 불러야 마땅한 상황이다. 대외적으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전쟁으로 반도체 산업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것도 문제지만, 대내적으로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곳에 지어지는 공장” 상황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반도체 생산을 위해선 막대한 전기와 용수가 필요한데, 2019년에 선정된 용인 일반산업단지(용인 일반산단·에스케이하이닉스 입주)와 2024년 승인된 용인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용인 국가산단·삼성전자 입주) 모두 산업용수와 전력 공급 문제로 도전 앞에 서 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올해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보고서에는 이와 관련한 우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사처는 지난 1월 발표한 ‘발전용 댐 용수의 다목적 활용을 위한 입법 및 정책 과제-화천댐 용수의 용인 국가산단 공급계획을 중심으로’ 보고서에서 용인 국가산단 본격 가동 시점인 2035년 기준, 물 부족 문제를 지적했다. 기존 수도권에 물을 대는 소양강·충주댐 여유량이 하루 약 5만톤(㎥)에 불과하지만, 용인 국가산단 가동 시점이 되면 수요는 25.9만톤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환경부는 국가수도기본계획을 변경해 2031년 하수 재이용수·팔당 여유량 20만톤/일, 2035년 화천댐 발전용수 전환 60만톤/일을 더 해 공급하겠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해법은 댐 사용료 부담 주체를 둘러싼 문제(경기vs강원), 발전용댐의 법적 지위, 상·하류 지역 간 부담·이익 배분 등 같은 제도·정치적 조정 없이는 추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강원도 수입천댐(추가 수원) 계획은 주민 반대로 멈춰 서 있고, 용인 클러스터 총수요(2035년 167만톤/일 추정) 대비 정부의 1·2단계 통합공급계획(107만톤/일, 여주보 26.5만톤/일 포함할 때 133.7만 톤/일)으로도 여전히 수십만 톤의 격차가 남는다는 분석이 반복된다. 물은 “대체 불가능한 공정 자원”이며, 하루 167만 톤은 서울시 하루 생활용수의 60%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격차를 줄이려면 하수 재이용 고도화, 단계적 수요관리, 상·하류 보상 체계 정비가 동시에 필요하다.

문제는 물 뿐만이 아니다. 전기 역시 구조적 제약이 드러난다. 평택 고덕산업단지(삼성전자 입주)에는 2024년 ‘북당진–고덕’ 500kV HVDC(직류송전) 3GW가 준공돼 서해안 발전력을 끌어오지만, 용인 국가산단의 경우 심각한 전력난이 우려된다. 용인 일반산단은 2026년 8월까지 전력구·변전설비를 완공해 1차 가동 시점 전력 인입을 맞추는 일정이 잡혀 있으나,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8월 발표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일반산단) 전력 공급 리스크 진단” 보고서를 통해 전력망 안전도 취약성, RE100 산단 연계 부족, 재정 부담과 사회적 비용(지중화·요금), 탄소중립 정책과의 목표 충돌을 리스크로 지목했다. 특히 “서울의 1.9% 면적에 서울 대비 면적당 32배” 수준의 전력 부하가 집중될 것이란 경고는, 설비 용량 확보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품질·안정도·수용성 과제를 암시한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운영하기 위해 송전 인프라는 32배 밀도로 보강되어야 할 테지만, 서울의 전철을 지하화하기 위한 노력만큼 송전망을 지중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없다. 인구 밀도가 낮으므로 송전망은 그대로 지상을 경유할 전망이다. 이에 대한 갈등도 클 수밖에 없다. 당장 하남 감일 지역에 들어설 예정인 송전탑은 주민들 반대로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전력난을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액화천연가스(LNG) 열병합발전소를 짓기로 했는데, 용인은 탈탄소 시대에 탄소배출 발전 지구로 변화할 예정이다.

요컨대 용수 문제는 공급 총량과 이익·책임의 분배 문제, 전기 문제는 송·변전망 신뢰도와 비용·시민들의 수용성 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이다. 애초 산단을 지정하면, 관련 인프라나 배후지 지정을 나중에 ‘수습’하는 지난 50여년의 관성적인 방식은 한때는 ‘빠른 추격’을 위한 장점이었지만, 생태학적 한계와 민주주의적 거버넌스라는 문제 앞에서 더 큰 ‘갈등’만 만들어 내는 중이다.

사실,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쉬운 방법이 있다. 반도체 팹을 물과 전기를 구하기 쉬운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북 새만금, 경북 구미, 충청권 청주나 대전 인근을 활용하면 물과 전기 문제에서 꽤 오랜 시간 해방될 수 있다. 다만, 새만금은 재생 에너지 고속도로를 활용할 수 있으나 핵심 소재의 공급망이 전무하고, 주변에 산업도시가 없어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전방 산업이 부재하다. 영남권의 경우 구미는 기존 전자산업 인프라와 핵심 소재 공급망을 활용할 수 있지만, 공항과 항만 접근성이 다소 약하다. 충청권은 공급망이 잘 구축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고 교통망이 완비돼 있으나, 팹을 운영해 본 경험이 부족하다. 이런 조건을 고려하면 2019년의 에스케이하이닉스 신규 공장 선정 당시 용인과 경합했던 구미에 산단을 조성하거나, 충청권 전체를 넓게 활용하면서 연구개발부터 팹까지 모든 가치사슬을 완성하는 구상도 반도체 산업 관점에서 채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도체 클러스터 선정에서 업계가 수도권을 낙점하며 빈번하게 언급하는 표현이 있다. 반도체 산업이 지식기반산업이기 때문에 인재 확보를 위해 수도권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반도체뿐만 아니라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모두 인재확보를 위해 ‘북상’을 선택해 왔다. 제조업 현직자들은 고기량 엔지니어를 확보하기 위한 ‘남방한계선’으로서 ‘천안 분계선’은 이미 무너졌고, 엔지니어는 기흥까지, 사무직은 판교까지가 한계라고 전하곤 한다. 사실 이는 대체로 서울 소재 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생각이다. 최근에는 울산, 창원, 포항, 거제 등 산업도시가 즐비한 동남권의 거점 국립대나 과학기술원 출신 이공계 학생들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한화오션 등 대기업의 채용이 경기남부에 쏠리는 것 때문에 오히려 수도권 기업에 원서를 쓰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얼마 전 만났던 현직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반도체 팹 자체에 들어가는 대졸 이상 엔지니어의 숫자는 많지 않기 때문에, 지역의 주요 대학과의 연계를 거치면 필요한 인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수도권의 연구개발인력과는 필요할 때마다 출장 등을 통해 협업하면 된다. 오히려 문제는 기술의 수명주기가 짧아 빠르게 전환을 반복하는 반도체 산업의 주기에 맞춰서 소재, 부품, 장비를 공급하고 연구개발까지 수행할 수 있는 ‘공급망’이다. 지금까지 이런 조건이 갖춰진 곳은 수도권과 충청권밖에 없다.

아무리 물과 전기라는 생태학적 한계에 직면하더라도, 1970년대 초중반 중화학공업화나 현재 중국의 제조업 굴기 같은 국가 주도 산업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아닌 이상 결국 입지 선정은 반도체 대기업의 몫이다. 지역의 산업역량 확보라는 균형발전 관점, 재생에너지를 통한 탈탄소 에너지 전환, 산업의 손실 없는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결국 공장을 지방에 보내면 된다는 생각 이상의 산업전략 정책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용인 국가산단의 본격적인 가동은 10년가량 남았는데, 생태학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중화학공업화 초기를 능가하는 계획이 필요한 건 분명하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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