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광영]내 수술 동의서는 누가 사인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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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다리 절단 수술을 집도한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의사가 겪은 일이다.
80대 치매 남편을 간병해 온 70대 여성이 얼마 전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 동의서를 받아야 했지만 자식들이 미국에 살고 있어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온 여성의 절친들은 발만 동동 구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역시 환자가 친밀한 사람을 사전에 대리인으로 지정하면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2022년 법 개정을 시도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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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보다 진한 사이여도 가족 아니면 불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지 않은 환자는 수술방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병원에선 수술 동의 절차를 중시한다. 환자에게 수술 내용과 합병증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는 건 의료진의 법적 의무인 동시에 의료 사고에 대비한 방어책이기도 하다. 환자가 멀쩡할 땐 직접 서명하면 되지만 응급 상황으로 의식이 없거나, 치매 등으로 판단력이 온전치 않은 때도 있다. 이 경우 보호자가 대신 서명하는데 보호자의 범위가 좁다. 부모 자식이나 배우자, 생계를 같이 하는 친족 등 민법이 규정한 가족으로 제한돼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 함께한 ‘피보다 진한’ 관계여도 법적 가족이 아니면 일분일초가 급할 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가족이라면 환자를 책임질 뜻이 있을 거란 전제를 깔고 있는 게 지금의 제도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가족과 연을 끊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서명인 부재 상황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80대 치매 남편을 간병해 온 70대 여성이 얼마 전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 동의서를 받아야 했지만 자식들이 미국에 살고 있어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온 여성의 절친들은 발만 동동 구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고령화로 노부부가 서로를 돌보는 가정이 늘고 있어 이런 일들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
올해 전체 가구의 42%까지 늘어난 1인 가구는 또 어쩔 것인가. 갑자기 아프거나 위급할 때 누가 수술 동의서를 써주고 돌봐줄 것이냐는 이들의 가장 큰 근원적 공포다. 보호자가 민법상 가족에 묶여 있다 보니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진다. 책 ‘친구를 입양했습니다’의 저자 은서란 씨는 5년간 함께 산 친구를 딸로 입양했다. 둘 중 하나가 아플 때 도울 수 있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고 한다. 젊은 세대는 이런 대책이라도 세우지만 1인 가구 중 가장 비중이 큰 세대는 70대 이상 노년층이다. 시대착오적인 수술 동의 제도의 직격탄을 가장 먼저 맞는 건 노인들이다.
미국이나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가족뿐 아니라 친한 친구도 환자 대신 의료적 결정을 할 수 있게 열어놨다. 우리 역시 환자가 친밀한 사람을 사전에 대리인으로 지정하면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2022년 법 개정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친분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의료 사고 나면 손해배상은 누가 받느냐는 등의 논란 속에 흐지부지됐다.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두 성인이 합의하면 가족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자는 생활동반자법도 발의돼 있지만 동성애를 용인한다는 일각의 반대에 발목 잡혀 있다. 그사이 가족의 범위를 넓혀 서로 지탱해주는 관계를 늘리자는 본질은 흐릿해지고 있다.
돌봐줄 관계 못 넓히게 막으면 모두가 피해
의료는 시간이 생명인 경우가 많다. 수술 동의서를 제때 받지 못해 골든타임을 놓치는 환자가 많아지면 당사자는 불행해지고, 의료진은 최적의 치료를 할 수 없다. 정부 역시 짊어져야 할 복지 부담이 커진다. 법률상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을 병원 밖으로 밀어내는 경직된 제도 속에선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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