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인간성 추락까지 감내하며 지킨 건 욕망에 집착하던 ‘웃픈’ 현실이었나"

이규희 2025. 9. 3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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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
만수의 ‘불란서풍’ 주택에 대한 집착
중산층 밑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몸부림
우아한 취미로 그려진 ‘분재’ 장면에선
아름답기 위한 폭력의 불가피성 정당화도
관객후기 호불호 극명…흥행 좀더 지켜봐야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좁은 시야에 갇힌 사람들이 죽고 죽입니다. 그러나 인간 경쟁자를 없앤 자리에 결국 인공지능(AI)이 들어서요. 모든 것이 다 허망해지는 투쟁의 이야기죠.”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9월24일 개봉)는 실직한 중산층 가부장 ‘만수’(이병헌)의 도덕적 추락을 그린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만수는 자동화된 공장에서 AI 로봇과 마주한다. 인간 경쟁자를 몰아낸 자리를 기계가 차지한 셈이다.
지난달 말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은 “관객에게 사랑받고, 오래 살아남아 다음 세대도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고 밝혔다. CJ ENM 제공
만수가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쏟는 ‘집’은 그 자체로 시대와 계층을 상징한다. 1970년대 중산층 사이에서 유행한 ‘불란서 주택’에 노출 콘크리트를 덧댄 형태다. 이 기묘한 혼종의 건축 양식에는 중산층의 보편적 욕망과 계층 하락의 불안이 동시에 스며 있다.

지난달 말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만수의 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만수의 아버지가 돼지농장을 크게 하던 시절, 큰돈을 갑자기 번 사람들이 지었을 법한 집이에요. 유럽 건축 양식을 막연히 동경하며 지었지만 실제로 세련된 양식은 아니고, 잡탕처럼 똑같은 도면으로 쉽게 지어진 모델이죠. 세월이 흘러 만수가 손을 보아 지금의 형태가 되었고요. 기묘한 레트로 스타일이 되었고, 족보 없는 혼종의 양식이기에 묘한 매력이 있어요.”

이병헌이 연기한 ‘유만수’는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유’는 ‘you’, ‘만’은 ‘man’으로 표기한 영어 자막을 고려해 지은 이름이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던 ‘올드보이’(2004)의 ‘오대수’를 연상시키는 극 중 대사 ‘유지보수만 수차례’는 배우 김형묵의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스틸샷. CJ ENM 제공
영화는 계급 간의 투쟁이 아니라 중산층 내부의 경쟁과 비극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해고되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거나 노동운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 방향으로 가지 않아요. 중간 계급 안에서 서로 경쟁하며 죽고 죽이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 비극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밥을 굶을 정도로 생활이 어렵진 않지만, 딸의 첼로 레슨을 계속 시키고 싶고, 애써 가꾼 집을 떠나 작은 아파트로 이사 가기도 싫은 욕망. 경제 사정은 나빠졌지만 이전과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는 강박이 바로 영화가 말하는 중산층의 모습이다. 영화는 과연 그런 삶을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 묻는다. “전락하기 싫은 만수의 마음이 한편 이해가 되다가도, ‘저러면 안 되지’ 하는 도덕적 판단으로 돌아서는 등 관객이 오락가락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를 바랐다”고 덧붙였다.

만수가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설정과 가을이라는 계절적 배경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인 ‘밀려남’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작동한다. 영화 첫 장면, 만수는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을 느끼며 흡족해한다. 꽃잎이 흩날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자 무더운 여름이 지나갔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그러나 그가 맞이하는 가을은 알곡을 수확하는 생산성 넘치는 계절이 아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불며 차가운 비가 내리는 소멸과 쇠퇴의 계절이다. 영화는 곧 겨울이 온다는 일기예보와 함께 막을 내린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스틸샷. CJ ENM 제공
만수의 ‘분재’ 취미는 류성희 미술감독의 제안으로 들어갔다. ‘식물인간’인 만수의 온실을 꾸미는 요소이지만, 장식을 넘어 ‘폭력’의 도구로 활용했다. “분재는 식물을 가꾸는 동시에 인위적으로 구부리는 폭력의 행위이기도 하죠. 영화 초반, 유튜브를 보던 만수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장면은 이후 벌어질 폭력을 예고합니다. 만수가 시체를 처리할 때도 (이 기술을) 아름답게 활용할 수 있었죠. 제가 ‘아름답게’라고 하면 사람들이 웃던데, 전기톱보다는 낫지 않나요?”

영화 속 의상 한 점, 음악 한 마디까지 철저한 계산이 담겨 있다. ‘아라’(염혜란)와 ‘미리’(손예진)가 입은 빨간색, 파란색 브이넥 스웨터는 같은 디자인을 색깔만 다르게 제작했다. 두 인물 사이의 연결점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인상적인 삽입곡인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김창완의 ‘그래 걷자’는 편집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음악의 특정 구간과 인물의 행동을 매치하기 위해 프레임 단위로 세심하게 조율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스틸샷. CJ ENM 제공
그렇다면 박 감독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이토록 엄밀한 균제미를 추구할까. “과연 관객이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 따라올까, 그리고 좋아할까. 오로지 그 두 가지 고민만 합니다. ‘좋아한다’는 건 단순히 웃거나 환호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아요. 때로 역겨워하고 눈을 가릴지라도, 넓은 의미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도 포함됩니다. 관객이 즐기지 못할 영화를 왜 만들겠습니까. 사랑받고, 이해받으며, 오래 살아남아 다음 세대도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개봉 첫날 ‘문화가 있는 날’ 할인 효과로 첫날 33만여명을 동원하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개봉 첫 주말(27∼28일) 관객 수는 양일 모두 24만명 선에 그쳤고, 29일 관객 수는 7만8800여명 수준으로 급락했다. 관객들의 입소문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의미다. 영화는 해외 선판매만으로 순제작비를 회수했지만, 국내 관객 반응은 업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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