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섬나라들, 겉으론 ‘중립’ 선언 - 속으론 ‘친미·친중’ 제각각[Global Window]
강대국 경쟁 속 자립 ‘평화의 바다’ 채택
도서국 협력해 외부 압력 저항
솔로몬제도에 모여 ‘연대’ 선언
해양환경·어업관리·경제원조
각국 선 순위 달라 실행 미지수
미국·호주 영향권에 있었지만
中, 경제·인프라 지원 등 구애
“이이제이에 말려드나” 우려도

군사·외교적으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해온 남태평양 도서국들이 거칠어지는 미·중 경쟁에 중립과 자립에 방점을 둔 ‘평화의 바다’(Ocean of Peace) 이니셔티브를 채택하면서 단일 목소리를 강조하고 나섰다. 갈수록 격해지는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 확대 경쟁에 선택을 압박받자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입지를 다지기 위해 연대에 나선 모습이지만, 각국이 친미, 친중, 친호(친호주) 등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어 실제 이행 여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만 문제 등에서 미국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 지역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중국의 ‘이이제이’ 전술에 말려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어 남태평양 섬의 외교적 해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평화의 바다’ 채택하며 ‘자립’ 의지 다져=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홍콩 자유 언론(HKFP) 등에 따르면, 지난 10일(현지시간) 18개 태평양도서국포럼(PIF) 회원국 지도자들은 솔로몬 제도 수도 호니아라에서 열린 연례 정상회의에서 ‘평화의 바다’ 이니셔티브를 채택했다. 이는 2023년 PIF에서 피지가 제안한 의제로 남태평양 도서국 간의 협력을 강화해 외부 압력에 저항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 △규제법 및 규범 존중 △외세 경쟁에서의 자립 △비군사화 등을 함축한 의제로 남태평양 국가들의 주권을 강화하고 상호 연대와 결속을 다지자는 의미가 깔려 있다. 남태평양 도서국은 전 세계 인구의 0.1%에 부과한 소국이지만 유엔에서는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한다. 즉 유엔총회 투표에서 6.7%의 몫을 가지고 있다.
올해 회의 주최자인 제레미아 마넬레 솔로몬 제도 총리는 “‘평화의 바다’ 선언은 우리의 주권과 공동의 운명을 되찾는 일”이라며 “이 선언은 우리의 바다, 하늘, 땅이 다시는 강대국 간의 경쟁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라고 강조했다.
2년 전 피지가 제안한 의제가 다시 지지를 받게 된 배경에는 최근 중국의 경제적 지원 등 간섭이 강화되고 미·중 간 경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남태평양 국가들의 주권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이번 PIF 정상회의 행사에 초청될 파트너국 선정이었다. PIF는 통상 호주와 뉴질랜드 등 주요국을 포함해 통상 수십 개 국가를 대화 파트너 자격으로 초대하는데 올해 개최국인 솔로몬 제도는 대부분의 파트너국 참석을 불허했다. 그 배경을 두고 중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솔로몬 제도가 오랜 참가국인 대만을 배제하려는 중국의 뜻에 따른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친미-친중 등 입장 차 달라 갈등 불씨 여전= 외부 압력에 대한 외교적 중립과 자립 의제를 채택해 상징적 의미에서는 매우 큰 성과를 냈지만 남태평양 국가 내에서도 친미, 친중, 친호 등 외교적 이해관계가 달라 실제 이행을 둔 갈등의 불씨가 잠재한 상황이다. 남태평양 국가들은 오랫동안 서구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원조 등 경제적 지원을 받아왔고 최근에는 중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이 두드러지게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미 다른 나라들과 외교적, 군사적 협력을 체결한 국가의 경우 ‘평화의 바다’ 선언과 충돌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또, 회원국들의 나라별 특색이 달라 해당 개념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현실적 문제도 대두된다. 일부 국가는 해양 환경, 기후변화, 어업 관리 등이 우선이고 어떤 나라는 안보·군사적 협력 또는 경제 원조가 더 시급한 경우도 있어 선언 이후 후속 조치에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평화의 바다’ 채택이 강대국 견제 목적도 있지만 원조 확보를 위한 외교적 지렛대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이 국가들은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이미 주변국의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 잡은 만큼 외세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는 요새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먼저 미국으로서는 미국의 태평양 군사거점인 괌과 쿼드 동맹의 한 축인 호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전략적 의미가 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장기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온 ‘텃밭’이다. 미국은 인도·일본·호주 등의 국가들과 연합해 중국을 봉쇄하려는 전략에서도 태평양을 요충지로 쓰고 있다. 반면 중국으로서 남태평양은 이 같은 봉쇄를 뚫고 중남미로 향할 수 있는 길목이다. 특히, 대만과 수교한 14개국 가운데 마셜제도, 팔라우, 나우루, 투발루 등 4개국이 남태평양에 있어 외교 강화를 통해 이 국가들이 대만과의 관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
◇미·중 모두 ‘지지’ 표명했지만 셈법 복잡= 미국과 중국은 PIF의 중립 선언에 표면적으로는 지지 의사를 밝혔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미국은 남태평양의 ‘비핵화’라는 이상에는 원칙적으로 공감하나 핵잠수함 등 핵우산 제공과 같은 군사적 영향력을 거두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신냉전 시대를 맞아 태평양에서의 중국 견제를 위해 오히려 군사적 존재감을 강화하고 있다. 괌, 팔라우, 마셜제도의 미군 기지를 확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중국 역시 태평양을 비핵화·평화의 바다로 만들자는 원칙을 적극 지지한다고 표명했으나 배경에는 미국의 핵우산 전략을 비판하는 외교적 무기로 활용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남태평양국이 ‘태평양은 특정 강대국의 뒷마당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미국 견제에 적극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대신 이를 계기로 경제·인프라 원조를 묶어 태평양 섬나라와 관계 강화를 모색해 미국 견제와 대만 문제에 있어 유리한 입지를 다지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에 남태평양 국가들 내부에서도 “중국의 ‘이이제이’ 전술에 말려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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