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7) 대종교 3부자 나철·나정련·나정문- 단군 정신 토대로 독립운동 구심점 역할 앞장
주권 상실한 민족에 희망의 메시지
일제 탄압 피해 만주서 항일 이어가
독립운동 새 전기 위해 스스로 순국
무장투쟁도 전개 청산리전투에 영향
장남 나정련 ‘북로군정서’ 등서 활약
차남 나정문은 민족정신 고취 앞장
모두 일제 조작 임오교란으로 순국

만주는 중국의 동북지방이다. 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내몽고 자치구를 포괄한 광범위한 지역을 일컫는다. 고대부터 여러 종족(여진족·거란족·말갈족)이 부대끼며 살던 삶의 터전이고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는 보잘 것 없는 변경지역. 여러 종족이 치고받고 살다보니 중국 입장에선 피곤하고 얻을 게 없는 변두리다. 중국에게는 눈길을 받지 못했지만 우리 한민족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곳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하 민족정신 고취를 통한 항일 독립운동기지로서 큰 역할을 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중 전라남도(광주 포함) 출신 11명은 만주계열 유공자로 분류돼 있다. 나정문과 나정련 형제도 이름 올렸다. 대종교 창시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홍암 나철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와 두 아들 등 3부자가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중국 길림성 화룡에서 용정으로 가는 도로변 산기슭에 대종교 3종사 묘역이 있다. 맨 왼쪽은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가운데는 대종교 대종사인 나철, 오른쪽에는 2대 교주 김교헌 종사가 묻혀있다. 묘역은 취재진이 찾은 6월 하순께 잡풀들이 수북히 덮고 있었다. 작은 봉분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각각의 무덤 앞에는 높이 1m 정도의 묘비와 상석이 놓여 있고, 묘의 우측에 서 있는 조그마한 돌 비석 앞면에 '반일지사무덤'이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반일지사 라철, 서일,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호를 기지로 반일 계몽운동과 반일 교육활동을 진행했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 사상 각오를 높이기 위해 많을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소속의 반일 무장부대와 국민회 소속의 반일 무장 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 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라고 쓰여있다.
단군 숭배 사상을 기초로 한 대종교가 만주 지방에서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청산리전투에도 영향을 줬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종교 창시자로 잘 알려진 나철은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다. 조선독립운동의 태산이자 해외독립운동의 본령이었다.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나철의 본명은 두영이었으나 인영으로 개명했다. 대종교를 창시한 이후에는 철로 바꾸었다. 그는 29세 때인 1891년(고종 28)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895년 오늘날의 세무서장에 해당되는 징세서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의 조선내정간섭이 갈수록 침략이 노골화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단군 사상으로 민족정신 부활
"5적을 베어서 내부의 병통을 제거한다면 우리와 우리 자손은 길이 독립된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사느냐가 여러분에 있고 죽느냐가 여러분께 있습니다. 제가 부족한 몸으로 이 의거를 주창하면서 오늘 줄줄이 흐르는 눈물을 거두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피를 씻으며 이 의거를 우리 혈성 있고 용기있는 여러분의 가슴에 제출합니다."
전남 벌교에 있는 나철의 생가에 있는 '을사오적처단 격려문'이다. 당시 민족 지도자의 울분과 결기를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그는 비밀단체 '유신회'를 조직하고, 일본 내 이토 히로부미와 정치적 대립 관계인 인사들을 설득하며 대일 외교항쟁을 전개했고, 을사오적을 처단에 나서는 등 다양한 구국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외교투쟁도, 을사오적 처단 의열투쟁도 모두 물거품이 됐다.
구국의 결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민족정신의 부활에 나선다. 단군을 모시는 고유사상에 주목했다. 고려 원종 이후 700년 간 맥이 끊긴 국조 단군을 정점으로 하는 '단군교'를 계승해 중광하고, 이를 1910년 '대종교'라고 개명해 정신적인 각성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주권을 상실한 암울한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중광이란 '어둠에 잠겼던 단군교(대종교)를 다시 밝히면서 광명세계를 이끈 한배검(단군)의 교단이 다시 이어졌다'는 뜻이다.
대종교는 나라를 잃은 조선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 됐다. 교세도 급속도로 확산했다. 1910년 8월 교인 실태 조사 결과 2만1천539명으로 집계됐다. 대종교의 교세 확장은 곧 독립운동의 확장이었다.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거세졌다. 1914년 나철은 대종교 총본사를 백두산이 보이는 중국 화룡현으로 이전했다. 바로 청산리대첩이 일어난 지역이다.
대종교는 만주서도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나철은 만주를 주 무대로 4대 본사를 설치, 교세 확장에 주력해 30만명의 신도를 확보했다.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통해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고취했다. 이주한 한인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했다. 각 교구들은 지역의 조선민족을 단합시켜 국외 독립운동기지 역할을 했다.
◇대종교 교세 만주서 급속 확산
대종교의 교세가 크게 늘자 일제는 당황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모든 종교를 신고토록 하면서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포교금지조치를 내렸다. 대종교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로 해산했다. 일제는 대종교를 조선민족주의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소굴로 간주했다. 유사종교단체로도 취급하지 않고 철저히 탄압했다.
교단의 위기는 독립운동 핵심기지로서 위치가 흔들릴 수 있었다. 나철은 결단했다. 죽음으로 대종교 탄압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고자 했다. 1916년 8월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단에서 스스로 숨을 거둔다.
나철의 큰 아들 나정련은 1882년 9월 17일 전라남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23살때 상경해 1909년 대종교 창시에 가담한다. 1914년 아버지와 함께 길림성 연길현 지인사 이주해 한인 교포들에게 대종교 전도와 함께 구룡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주입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22년 길림성 밀산현 당벽진으로 이주한 나정련은 북로군정서 기밀참모를 맡아 군자금 조달, 군량미 보급, 독립군 모집 등에 힘을 기울였고, 1941년에는 대종교 총본사가 있던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가 발해촌에서 경의원 참의 등 총본사의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1942년 11월 19일 '임오교변' 당시 일제 경찰에 체포된 그는 목단강성 목단강시 한양특별분구 액하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43년 8월 18일 그곳에서 옥사 순국했다.
나정문은 나철의 둘째 아들이다. 보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고, 19세 때 서울의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원산농공은행에서 2년, 성진척식은행에서 6년간 근무하다가 1909년 1월 대종교가 처음 조직될 때 입교한 이후 참교 · 지교 · 상교로 승진되면서 총본사에서 중책을 맡았다. 1942년 11월 만주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영안현서를 거쳐 목단강경무처에 구금된 지 15개월 만에 병보석되었으나, 출감 3일 뒤에 숨을 거둔다.
◇3부자 모두 조국 광복 못보고 순국
임오교란으로 나정련과 나정문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임오교란은 일제가 대종교의 민족정신 및 자주독립사상을 고취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1937년부터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영안현 동경성구 8가 부근에 있던 상경용천부 터에 단군을 모시는 천진전의 건립을 추진중이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소속의 국어학자 이극로가 천진전 건립 관계로 당시 교주인 윤세복에게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를 보낸 바 있었다.
일본 경찰은 미리 교단 내부에 심어 놓은 밀정을 통해 이를 압수하여 원고의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로 바꾼다. 또 그 내용 중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부분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는 뜻의 일본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를 중심으로 단군 문화를 다시 발전시킨다는 기치 아래, 조선 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목적이다"라는 죄목 하에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 이하 25명을 동시에 검거했다. 이 사건을 임오교변 이라고 한다.
당시 투옥된 간부 중 초대 교주 나철의 두 아들인 나정련과 나정문 형제를 비롯해, 권상익·이정·안희제·김서종·강철구·오근태·이창언·이재유등 10명이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국했다. 그 밖의 간부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세복을 비롯해 최소 7년, 최대 15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독립운동 구심점 역할을 하던 대종교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항일 무장투쟁이다. 1920년 청산리 대첩에 가담했던 북로군정서군이 바로 대종교가 양성한 조직이다. 대종교의 대한정의단에서 출발한 대한군정부의 또다른 이름이 바로 북로군정서다. 북로군정서 주요 인물로는 서일, 현천묵, 김좌진, 이범석 등이 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3대 교주(당시 호칭은 도사교)가 될 사람으로 공인받았다.서일은 자유시 참변에 이어 소련군의 후원을 받은 토비들의 습격을 받아 휘하 병사들이 궤멸되자, 이에 책임감을 느껴 대종교 도사교 직위를 계승하기 전에 자결했다. 후에 대종교 교단에서는 서일을 추존하여 도사교라고 부른다.
이렇듯 국내와 만주에서 활동하던 대종교는 일제의 수난과 박해 속에서도 단군 정신을 중심으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전남 보성출신 나철과 아들 정련·정문의 3부자가 있었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중국 화룡/김성빈 기자 ksb@namdonews.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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