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 투자 거부하면, 트럼프는 보복할 것이다

한국은 미국에 연간 125억 달러(약 17조원) 규모의 상품을 더 수출하기 위해 3500억 달러(약 480조원)를 내주어야 하는가. 저명한 진보 성향 미국 경제학자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딘 베이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공동 설립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9월11일 이 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한 칼럼에서 베이커는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 수천억 달러씩 건네기보다 그 돈의 20분의 1로 “자국 내 노동자와 기업을 지원하”는 쪽이 낫다고 주장했다. “관세 인상으로 잃어버릴 수출분을 상쇄하고 훨씬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 수천억 달러를 내느니 차라리 관세 인상을 감수하고 국내 보조금을 늘리라고 권유한 셈이다.
선의의 충고라는 점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진지하게 참고할 만한 의견일까. 베이커는 한국에 대한 관세율이 0%에서 15%로 인상되면 대미 수출액은 5% 줄어든다고 가정했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 수출액은 1320억 달러(약 182조원)였다. 15% 관세율이 적용되면, 수출액이 5%(1320억 달러의 5%인 66억 달러) 줄면서 1250억 달러(약 172조원)까지 내려간다는 이야기다. 만약 미국의 투자 압박 거부로 관세율이 10%포인트 추가 인상(15%→25%)된다면? 한국의 대미 수출액이 1250억 달러에서 10%(125억 달러) 줄어 1125억 달러(약 155조원)로 감소할 것으로 추정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4월 ‘해방의 날’ 패키지에서 한국에 25% 관세율을 발표·부과했다(일부 품목은 유예). 지금은 ‘대미 투자 3500억 달러와 관세율 15%의 교환’ 제안을 두고 한·미 협상이 진행 중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지금의 25%를 15%로 낮춰봤자 125억 달러를 더 수출할 뿐인데 3500억 달러를 통째로 내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베이커의 핵심 주장이다.
그러나 베이커의 이 글은 진지한 연구 보고서가 아니라 칼럼이다. ‘관세율 인상으로 한국산 제품의 미국 현지 가격이 얼마나 올라 수요 및 수출액을 어느 정도 줄일 것인가(무역 탄력성)’에 대한 실증(實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역 탄력성은 까다로운 연구 주제다. 베이커는 한국의 대미 무역 탄력성(관세율 15% 인상→수출액 5% 하락, 10% 추가 인상→수출액 10% 추가 하락)을 별도의 연구 없이 사실상 직관에 따라 추정하고, 이에 따른 정치적 결론을 도출했다.
더욱이 무역 탄력성을 둘러싼 추정은 한국이 놓인 국제정치적 현실의 맥락에선 ‘숫자 놀음’과 다름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 탄력성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들의 의지는 한국으로부터 3500억 달러를 받아내는 것 자체에 쏠려 있다. 심지어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빼앗는 형국을 노출할수록 트럼프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의 지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터이다. ‘마가’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을 희생시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빼앗아야 미국의 위대함을 회복할 수 있다.
한국이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거부하는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율을 과연 25%까지만 올릴까? 그는 한국 정부와 기업, 시민들을 괴롭힐 수많은 수단을 갖고 있다.
트럼프의 보복 수단들
트럼프는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 거부를 법률적인 ‘국가비상사태’로 간주할 수 있다. 지난 9월4일 트럼프 행정명령(미·일 무역합의)에 따르면, 일본은 관세율을 27.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5500억 달러 규모의 공공자금을 미국에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일본이 이 ‘약속(commitments)’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날 서명한 행정명령에 트럼프는 이렇게 썼다. “나(트럼프)는 본 명령(관세율 15%)을 수정해”서 “국가비상사태(emergency)에 대처하고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the threats to national security)을 줄이거나 제거할 것이다.” 일본에 대한 관세를 다시 올릴 수 있다는 엄포다.

트럼프가 특정 상황을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하려는 이유는 뭘까. 국가비상경제권법(IEEPA)에 근거해 대통령 권한만으로 해외 국가를 제재(자산동결, 외환거래 제한, 금융·무역·투자 제한 및 금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감금, 북한의 핵 개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적대국이 벌인 사건에 대응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경제제재를 시행했다. 다만 트럼프처럼 무역적자를 국가비상사태로 선포한 경우는 없다. 그는 전 세계를 제재한 셈이다. 관세는 본래 의회 소관이기 때문에,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관세 대폭 인상을 채택한 것은 법적으로 논란이 크다. 현재 관련 소송이 미국 내에서 진행 중이며 대법원 판단만 남아 있다.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은 자동차·철강·반도체 등 주요 전략산업의 관세와 관련된다. 근거는 무역확장법 제232조다. 제232조의 경우, 상무부가 ‘일본의 자동차 때문에 미국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라는 보고서만 제출하면, 그로부터 90일 이내에 대통령이 관세나 쿼터(수입제한 양)를 조정하게 되어 있다. 사실상 트럼프가 전권을 행사하는 구조다.
한국이 베이커의 권고대로 대미 투자를 거부하고 그 일부를 국내 보조금으로 쓴다면? 트럼프는 ‘한국의 불공정행위(정부가 수출기업에 보조금을 준다면 해당 기업은 미국 시장에서 다른 기업들에 대해 가격경쟁 우위를 누릴 수 있다)로 미국 산업이 피해를 입었다’며,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다. 무역법 제301조에 따른 보복관세, 상계관세(보조금 피해 판정 시 부과),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 조치) 같은 수단이 있다. 상무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 등의 조사와 판정을 거쳐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다. 충성파들이 경쟁하는 트럼프 행정부에선 사실상 대통령이 실질적 권한을 행사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에게 합리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합리성이 있다면, 한국에 외환보유고의 80% 이상인 3500억 달러를 내놓으라는 식의 요구 자체를 할 수 없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대미 투자 3500억 달러를 받아들여야 하나? 트럼프가 한국에 요구하는 대미 투자 프레임은 일본의 선례를 통해 이미 대충 알려져 있다(〈시사IN〉 제940호 ‘ATM으로 전락한 일본, 한국 3500억 달러는?’ 기사 참조). 미국에 ‘독립법인(펀드)’을 설정한다. 한국은 이 펀드(이하 한·미 펀드)에 3500억 달러를 투입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펀드의 운용권을 가진다. 수익금은, 양국이 일정한 비율로 배분하다가 일정 기간 이후엔 미국이 90%를 갖는다.
최근 쟁점화된 사안은 3500억 달러의 투입 방식이다. ‘전액 지분투자’의 경우, 한국이 한·미 펀드에 3500억 달러의 외화 자산을 꽂는다. 한국은 이 펀드의 ‘운용권 없는 대주주’다. 주주이므로 투자금은 돌려받을 수 없다. 펀드가 부실화되면 한국은 그냥 투자금을 날리는 셈이다. 당신이 주주인 기업이 망하면 그 지분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미국과의 잔인한 치킨 게임
다른 하나는 대출(과 대출보증)이다. 3500억 달러 가운데 예컨대 100억 달러만 지분투자하고 나머지 3400억 달러는 한국의 국책 금융기관들이 한·미 펀드에 대출하거나 대출보증 서비스로 제공한다. 이자를 받을 수 있으니 언뜻 보기엔 지분투자보다 유리하다. 그러나 이 펀드는 ‘독립’법인(SPV)이다. 법률적으론 펀드가 빌렸지 트럼프 행정부는 빌린 적이 없는 것으로 규정된다. 펀드가 부실화되면 대출 원리금이 전액 날아간다.
더욱이 약속된 자금은 트럼프 임기 동안 전액 펀드에 투입하도록 되어 있다. 지분투자든 대출(및 보증)이든 한국의 위험부담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위험을 전혀 감당하지 않는다.
한·미 펀드에 지분투자나 대출로 투입할 달러의 재원으로는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가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들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한국은행에서 원화로 바꿨다. 이렇게 한국은행에 28년 동안 쌓인 외화 자산이 지난 7월 말 현재 4113억 달러(외환보유고)다. 이 외환보유고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준비금’이다. 한국의 대외 신용도를 받쳐준다. 국제시장에서 달러를 조달하기 힘들 것으로 보이는 국가나 그 국적의 기업은 거래에서 배제된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한국은행이 국책 금융기관(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에 달러를 대출하고, 국책 금융기관들은 한·미 펀드에 지분투자하거나 빌려줄 수 있다. 혹은 한국 정부나 국책 금융기관이 달러를 빌려(달러 표시 채권 발행)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외채 폭증, 원화 가치 폭락,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조달비용(금리) 상승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 정부에 ‘통화 스와프’를 요구한 것은 국가 신용도와 금융안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다. 한국은행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에 예컨대 14조원을 맡기고 대신 100억 달러의 사용권을 얻는다(맞교환). 일정 기간 뒤에 한국은행은 14조원, 연준은 100억 달러의 사용권을 되찾는다. 한국이 미국 달러로 지급할 능력을 갖췄다고 보이는 것만으로도 신용도를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다. 미국 연준은 유럽연합·일본·영국·캐나다·스위스 중앙은행들과 상시적이고 맞교환 규모에 제한 없는 스와프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의 통화 스와프 요청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왜 영국·캐나다·스위스 등이 아니라 한국에 무리한 대미 투자를 강요하는가.
한국은 미국과의 잔인한 치킨 게임으로 내몰리고 있다. 대미 투자를 거부하고 관세 인상을 수용하면 치킨 게임 단계로 들어간다. 그러나 총중량 10t급의 대형 트럭과 중형 승용차 사이엔 치킨 게임이 성립할 수 없다. 강자인 트럼프 행정부는 믿을 수 없는 협상 대상인 데다 끊임없이 새로운 위협 수단을 꺼내며 한국을 불확실성 속에 빠뜨려왔다.
한국이 대미 투자를 거부하면 보복관세 등 트럼프 행정부의 반격을 각오해야 한다. 지금의 국내 정치가 이로 인한 충격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행태로 볼 때 트럼프는 한국의 반헌정 세력과 연합해 정치적 혼란을 의도적으로 초래하는 방법도 마다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9월 중순 현재 한국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위험 재배분 등의 타협안도 거부하며 ‘일본 스타일’의 거래(deal)만을 강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협상이 아니라 굴복을 원한다. 한국에게 체념은 용납되지 않지만 분개 또한 무력한 형국이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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