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근 칼럼] ‘미국과 헤어질 결심’을 하기 전에

박일근 2025. 9. 30.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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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수갑 채우고 500조 선불 겁박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트럼피즘 같아
굴욕 역사 피하려면 국력부터 키워야
박일근 한국일보 수석 논설위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인 미국 조지아주는 우리 동포들도 10만 명이나 살고 있는 곳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을 꿈꾼 땅이기도 하다. 그런 조지아주의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공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 간 장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만드는 걸 돕겠다고 간 동맹국의 기술자들은 인종차별과 인권침해까지 당했다.

더구나 당혹감이 가시기도 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국이 관세 협상 중 합의한 3,500억 달러(약 500조 원) 투자는 “선불”(upfront)이란 직격탄을 날렸다. 한술 더 떠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한국의 대미 투자금을 일본 수준(5,500억 달러)으로 올려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동안 많은 한국인은 미국에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독립운동 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가장 컸지만 우리가 일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엔 미국 덕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및 중국과 싸우다 숨진 미군도 3만6,574명이나 된다. 그런데 믿었던 미국이 돌연 날강도나 다름없는 횡포를 부리니 한국민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항상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였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좋은 예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보장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인정한 이 합의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방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을 경우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도록 한 조미수호통상조약도 미국은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시켜 배신을 숨기지도 않았다.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는 게 미국의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하고 자유무역 해상 운송 체제를 수호하며 자유 진영의 안보를 보장하는 게 미국의 이익에 부합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재정 적자 문제도 풀어야 하는 미국은 더 이상 여력이 없다. 트럼프가 ‘자유무역의 종언’을 고하고 공짜 해상 무역로로 이득을 본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에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는 배경이다.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이 경고한 대로 각자도생의 시대다.

이제라도 냉정하고 차분하게 미국의 본질을 직시하고 우리의 장기적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 한반도 천동설과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미국이 영원히 우리 편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일부 운동권의 시각으로 미국을 지나치게 악마화하는 것도 곤란하다. 외부의 적에 충동적으로 강경 대응하는 건 정권 지지율 상승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진정한 국익을 해칠 수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기 십상이다. 미국이 무례하게 군다고 북핵을 머리 위에 둔 채 ‘미국과 헤어질 결심’을 할 수도 없다. 중국 쪽으로 가는 건 더욱 답이 아니다. 한국을 중국의 일부로 여기는 시진핑 주석의 인식은 트럼프도 폭로한 바 있다.

결국 스스로의 힘부터 키우는 게 순서다. 트럼프의 청구서를 받은 나라들은 모두 미국에 안보를 의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잘 안다. 반면 우린 미국을 여전히 모른다. 일본의 뜻대로 관세 협상의 틀이 투자로 바뀐 것도 심상찮다.

120년 전 고종은 가쓰라-태프트 밀약도 눈치채지 못한 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을 극진히 대하면 잘될 줄 알았다. 세계 질서의 변화에 무지해 당했던 굴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린 장담할 수 있을까.

박일근 수석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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