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근 칼럼] ‘미국과 헤어질 결심’을 하기 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트럼피즘 같아
굴욕 역사 피하려면 국력부터 키워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인 미국 조지아주는 우리 동포들도 10만 명이나 살고 있는 곳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을 꿈꾼 땅이기도 하다. 그런 조지아주의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공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 간 장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만드는 걸 돕겠다고 간 동맹국의 기술자들은 인종차별과 인권침해까지 당했다.
더구나 당혹감이 가시기도 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국이 관세 협상 중 합의한 3,500억 달러(약 500조 원) 투자는 “선불”(upfront)이란 직격탄을 날렸다. 한술 더 떠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한국의 대미 투자금을 일본 수준(5,500억 달러)으로 올려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동안 많은 한국인은 미국에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독립운동 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가장 컸지만 우리가 일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엔 미국 덕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및 중국과 싸우다 숨진 미군도 3만6,574명이나 된다. 그런데 믿었던 미국이 돌연 날강도나 다름없는 횡포를 부리니 한국민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항상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였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좋은 예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보장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인정한 이 합의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방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을 경우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도록 한 조미수호통상조약도 미국은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시켜 배신을 숨기지도 않았다.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는 게 미국의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하고 자유무역 해상 운송 체제를 수호하며 자유 진영의 안보를 보장하는 게 미국의 이익에 부합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재정 적자 문제도 풀어야 하는 미국은 더 이상 여력이 없다. 트럼프가 ‘자유무역의 종언’을 고하고 공짜 해상 무역로로 이득을 본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에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는 배경이다.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이 경고한 대로 각자도생의 시대다.
이제라도 냉정하고 차분하게 미국의 본질을 직시하고 우리의 장기적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 한반도 천동설과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미국이 영원히 우리 편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일부 운동권의 시각으로 미국을 지나치게 악마화하는 것도 곤란하다. 외부의 적에 충동적으로 강경 대응하는 건 정권 지지율 상승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진정한 국익을 해칠 수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기 십상이다. 미국이 무례하게 군다고 북핵을 머리 위에 둔 채 ‘미국과 헤어질 결심’을 할 수도 없다. 중국 쪽으로 가는 건 더욱 답이 아니다. 한국을 중국의 일부로 여기는 시진핑 주석의 인식은 트럼프도 폭로한 바 있다.
결국 스스로의 힘부터 키우는 게 순서다. 트럼프의 청구서를 받은 나라들은 모두 미국에 안보를 의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잘 안다. 반면 우린 미국을 여전히 모른다. 일본의 뜻대로 관세 협상의 틀이 투자로 바뀐 것도 심상찮다.
120년 전 고종은 가쓰라-태프트 밀약도 눈치채지 못한 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을 극진히 대하면 잘될 줄 알았다. 세계 질서의 변화에 무지해 당했던 굴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린 장담할 수 있을까.
박일근 수석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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