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Why] ‘서방 vs 푸틴 대리전’ 몰도바 총선… 친유럽이 이겼다
국제사회가 주목, 왜?

영국 공영방송 BBC와 프랑스 유력 일간 르몽드,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 등 유럽 주요국 언론들은 29일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사이에 낀 동유럽의 소국 몰도바에서 전날 벌어진 총선 결과를 일제히 톱 뉴스로 보도했다. 친유럽연합(EU)·친서방 성향의 집권 여당 행동과 연대당(PAS)이 의석 과반(51석)을 훌쩍 넘긴 55석을 확보해 야권에 압승이 유력시된다는 내용이 밝은 표정의 마이아 산두 대통령의 모습과 함께 상세히 나왔다.
몰도바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국이 됐다. 면적(약 3만4000㎢)은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과 비슷하고, 인구는 260만명으로 대구광역시(약 233만명)보다 약간 많다. 옛 소련을 이루던 15국 중 영토가 아르메니아에 이어 둘째로 좁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7000달러대로 유럽 최저 수준이다. 이름도 생소한 작은 나라 선거 결과에 유럽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이 선거가 향후 유럽 정세를 좌우할 EU 및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대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대리전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유럽 언론들은 “총선 승리로 푸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EU에 가입하려는 몰도바 정부의 움직임에 탄력이 붙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산두 대통령은 “우리는 EU에 합류하고, 영토를 지켜 내고, 민주주의를 강화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며 승리를 반겼다. 세계은행에서 근무한 경제학자 출신인 그는 총선 전날 X에 “몰도바의 미래는 모스크바가 아닌 몰도바인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올리는 등 반러시아 표심 결집에 주력해 왔다.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사이에 낀 몰도바는 지정학적 특수성, 우크라이나 상황과의 유사성 때문에 ‘잠재적 화약고’로 여겨져 온 나라다. 인종·언어적으로는 루마니아와 동질성이 크지만, 과거 소련의 이주 정책으로 러시아계가 많이 옮겨왔고, 인구의 15%는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특히 동부 우크라이나 접경 지대에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정부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친러 세력의 집결지다. 자치 공화국임을 내세우며 러시아와 밀착했고, 푸틴 정권 역시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수천 명의 러시아군을 파병했다.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 몰도바가 ‘제2의 우크라이나’ 신세가 될 수 있다는 EU·나토 진영의 우려는 더욱 커졌다. 푸틴이 ‘친러시아 세력 보호’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해 동부 돈바스를 점령했듯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렛대 삼아 몰도바를 노릴 수 있다는 시나리오까지 나왔다. 푸틴이 몰도바를 자국 영향권에 넣을 경우 우크라이나는 더욱 고립되고, EU·나토 진영인 루마니아까지 풍전등화 상황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EU·나토 회원국 지도자들도 총선을 앞두고 ‘몰도바 친서방 정부 구하기’에 앞장섰다.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혼합된 몰도바에서 친러 세력이 원내 1당이 될 경우 친서방 대통령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가 잇따라 몰도바 수도 키시너우를 방문해 산두 대통령과 만나 몰도바의 EU 가입을 공개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사실상 친서방·EU 표심 결집에 나선 것이다.
몰도바 정부도 러시아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선거를 일주일 앞둔 지난 21일 친러시아 세력이 민심을 동요하려는 대규모 소요 사태를 계획했다는 혐의로 전국 250여 곳을 압수 수색해 100여 명을 체포했다. 대표적인 친러 인사인 이고르 도돈 전 대통령은 부당한 표적 수사라고 반발했지만, 산두 대통령은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하려 한다”고 반박하는 등 친러·친서방 진영 간 갈등은 과열됐다.
이번 총선을 통해 푸틴의 유럽 내 영향력 확대 차단에 부심해 온 EU·나토 진영이 상당한 승리를 거뒀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친러 야당 측이 “선거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당분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러시아가 몰도바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거나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둔군을 움직여 친서방 정부를 위협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번 선거 결과가 옛 소련 지역에서 푸틴 영향력이 차츰 약화하는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푸틴은 과거 영광을 찾겠다며 옛 소련 국가들을 자국 영향권에 두려는 무력 공세를 이어왔다. 2008년 친러 노선에서 탈피하려는 조지아를 침공해 굴복시켰고,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3년 7개월째 전쟁 중이다. 하지만 최근 옛 소련 국가들이 서방과 접촉면을 넓히는 상황이 잇따르고 있고,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 출범 후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트럼프는 지난 23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샵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의 통화 사실과 미국산 항공기·철도 장비 구매 등 경제 협력 성과를 알렸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중국과 협력해 온 중앙아시아를 미국이 본격 공략하려는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트럼프는 또 지난달에는 오랫동안 영토 문제로 유혈 분쟁을 벌여온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정상을 백악관으로 불러 공식적으로 화해시켰다. BBC와 가디언 등은 “몰도바 총선이 구소련 지역에서 푸틴의 영향력이 약화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사건일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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