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석칼럼] K컬처,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타고 국경 넘은 호랑이…세대교체를 준비하라

이형석 2025. 9. 2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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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 ‘헌트릭스’의 멤버 미라, 루미, 조이 [넷플릭스 제공]

‘대한민국 문화예술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K-컬처가 세상 힙한 것이 됐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K-붐’이라고까지 아울러진 이 현상엔 한국의 영화, 드라마, 음악, 뮤지컬 등 대부분의 대중문화 장르와, 문학과 같은 일부 순수예술, 그리고 식품, 패션, 뷰티, 관광 등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그 영역은 더 확산 중이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과 영화, 드라마로 노출된 덕에 한글이나 한국어, 갓·한복같은 전통복식·문화유산 등에 대해 쏟아지는 세계인들의 전례없는 관심으로까지 말이다.

무엇때문일까. 여러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 중의 하나. ‘경계’라는 열쇠말로 풀어낼 수도 있다. 가장 처절하고 아름다우며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이야기의 형식은 늘 ‘경계’로부터, ‘경계를 넘는 사람들’로부터 빚어져왔기 때문이다. 그 경계란 국경이나 전쟁의 최전선, 강제수용소의 장벽 같은 물리적인 것일 수도, 민족·계급·종교·성(性) 같은 추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드라마의 근원이며, 그것은 다양한 경계 위에서 펼쳐진다.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시·공간은 세계 그 어느 곳과도 같지 않은 무수한 경계가 가로지르는 곳일 터다. ‘K-붐’ 자체가 세계 근·현대사에선 압도적으로 보기 드물게, 지역적으로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 사용되는 ‘소수언어’를 기반으로 창조된 문화와 예술이, 국경과 인종·민족을 초월해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사례이기도 하다.

세상 힙한 K-컬처, ‘경계’에서 ‘경계인’들이 빚은 이야기들

‘K-붐’을 필연적 결과이거나 계획된 성과처럼 설명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계기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에’ 찾아왔다. ‘강남스타일’이 그랬고, ‘오징어게임’이 그랬다. 가장 최근의 ‘뜻밖’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대대적인 흥행 성공이다. 넷플릭스에서 지난 6월 공개된 이후 최근 3억 뷰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 조회수를 연일 경신하고 있고,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싱글 ‘골든’이 미국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한데 이어 앨범 순위 ‘빌보드200’마저 석권했다. 세계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역사적’이라고 할만한 ‘케데헌’의 흥행은 이 작품이 매우 한국적인 소재와 색깔을, 그야말로 외양(제목!)부터 뼛속까지 공공연히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뜻밖’이지만, 한국 회사가 아닌 넷플릭스와 소니픽쳐스에 의해 투자·배급·제작됐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 할만큼 의외였다.

이 작품의 흥행 현상의 열쇠는 아마도 매기 강 감독일 것이다. 5살 때 부모를 따라 한국을 떠난 이민 2세대이자 캐나다 국적의 한국인이다. 그렇다고 보면 ‘케데헌’ 이전에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감독 이성진)과 애플TV 시리즈 ‘파친코’(감독 코고나다·저스틴 전),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와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 송)가 있었다. 이 작품의 감독은 모두 한국계 미국인 또는 캐나다인으로 이민 2세대들이다. ‘파친코’는 원작 소설가 이민진도 이민 2세대인 한국계 미국인이다. 이들 작품의 소재 또한 이방(미국, 일본)의 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다. ‘케데헌’ 역시 ‘경계인’(인간과 악령의 혼종, 한국계 미국인 등)들이 겪는 정체성 갈등과 투쟁이 주제다. 이들 작품들 대부분이 미국 자본과 제작사가 주축이 돼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케데헌’의 사례가 그다지 이례적이거나 신기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물리적으로 가장 위험하고 단단한 장벽이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시적으로 멈춘 전쟁의 최전선’ 곧 ‘DMZ’(비무장지대)를 마주한 나라다. 식민지와 전쟁을 연이어 겪으면서도 경제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을 거쳐 선진국에 진입했고, 군사독재의 핏빛 강을 건너 민주주의국가로 발돋움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박해를 피해, 독립을 위해, 생존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강제 또는 자의로 세계 여러 나라로 이주한 ‘디아스포라’(이산·離散)의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고유의 문자와 언어를 국경 안에서 굳건하게 지켜냈다. ‘K-컬처’는 영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과는 다르게 식민지를 운영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언어도 아니며, 사용자가 지역·민족적으로 극히 제한된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강한 대중성과 보편성으로 세계인들을 매혹시켰다는 점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모국어 사용자의 인구 규모로도 중국어나 일본과는 비교가 어렵다.

민주주의와 기술, 장르로 얻은 ‘표현의 자유’

K-컬처의 힘은 고유의 ‘경계’로부터 발원하는 수많은 희로애락의 역사와 드라마에 있으며, 이를 자유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확대와 기술·자본력의 발전에 있다고 할 것이다. K-컬처는 ‘표현과 창작의 자유’가 내용에 있어선 정치·제도적인 민주주의의 문제이자, 기술적으로는 정보·통신·영상·음향산업 수준의 문제이며, 예술 형식상으로는 서구에서 기원한 장르의 독창적 수용 문제임을 방증한다. 예술창작에서 어떤 검열과 제재 없이 소재와 주제를 선택할 수 있어도, 이를 구현할 기술과 돈이 없으면 무소용이다. 영화나 드라마, 대중음악에서 전세계적으로 ‘양식화된’ 각종 장르와 스타일을 능숙하게 다룰 수 없어도 마찬가지다. 해외 콘텐츠와 시장에 대한 ‘개방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현재 ‘K-붐’의 주역들이 ‘민주화’와 ‘산업화’, ‘개방화’ 세례를 동시에 받은 첫 세대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대중음악과 영화에서 사실상 ‘검열’ 역할을 했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된 것은 1996년이었다. 그해 6월 7일부터 가요 음반 제작과 수입 때 의무적으로 받던 사전심의를 없앤 개정 법안(음반과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이어 10월 4일엔 헌법재판소가 영화 사전심의를 규정한 영화법에 대해 위헌을 판결했다. 1997년엔 음반과 영화 사전심의를 담당하던 기관인 공연윤리위원회가 해체됐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정보통신(IT)산업의 고도화를 추진했으며, 초고속 인터넷 시대를 실현했다. 이와 함께 2004년까지 단계적으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수입 제한을 철폐했다. 2006년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함께 극장의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절반(146일→73일)으로 줄인 새로운 스크린쿼터제를 시행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전반까지의 10년여간은 ‘K-붐’의 혹은 잉태기 혹은 유소년기라 할 것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우리 영화·음악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민주화의 결실로서 창작의 자유가 대폭 진전되면서 영화에선 분단의 역사나 사회 부조리, 국가폭력 등을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성과 폭력, 갈등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방식도 갈수록 과감해졌다. 할리우드와 유럽, 일본 영화 문법과 스타일에 익숙한 젊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하며 기술적·장르적 완성도도 높아졌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대중적 작품들이 관객 수백만에서 1000만명에 이르는 흥행을 이어가는 한편, 더 다양한 소재와 형식을 실험하는 독립영화들도 독자적인 생태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음반 사전심의가 폐지된 것은 물론이고 ‘퇴폐적’이니 ‘왜색풍’이니 가사와 노래의 정조(情操)뿐 아니라 출연 가수의 춤과 옷차림까지 규제하던 방송도 한층 자유로워지고, 새롭게 대중화된 케이블TV 등을 통해 소개된 록·힙합·알앤비(R&B) 등 외국음악에 익숙하게 된 창작·공연자들이 등장하면서 대중음악도 다양화되고 세련화됐다.

한국 대중문화사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당시의 풍경은 ‘케대헌’의 매기 강 감독의 증언으로부터도 드러난다. 매기 강 감독은 지난 8월 내한 기자회견에서 어려서부터 서태지와 아이들, 에이치오티(H.O.T.)를 정말 좋아했다고 했다. 듀스도 빼놓지 않았다. 이들의 곡은 ‘케대헌’에도 삽입됐다. 또 봉준호 감독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으며 특히 ‘괴물’을 최고로 꼽았다. 영화로는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이 시기 개봉해 분단을 소재로 한 액션 스릴러로서 대단한 호평과 흥행을 이끌어냈으며, 금기에 가까운 소재였던 북파공작원을 소재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가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JSA’도 분단을 소재로한 과감한 작품이었고, 박 감독은 이어 일본 만화 원작에 ‘근친상간’의 모티브를 더한, 당대로선 극한 파격의 ‘올드보이’로 국내는 물론 해외 영화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무능하고 부조리한 국가권력을 풍자한 봉준호 감독의 스릴러 ‘살인의 추억’이 개봉한 것도 이 시기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진압군을 주인공으로, 국가폭력이 파괴한 개인의 비극을 그려낸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도 이 때 관객을 만났다.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의 압력에 질식했던 영화계의 ‘상상력’이 역사와 사회를 화두로 가히 ‘폭발’하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캐릭터인 호랑이(더피)와 까치(서씨)의 모델이 된 신재현 1984년작 추정 ‘호작도’ [리움미술관 제공]

지속가능한 K-붐을 위한 조건

K-붐을 이끈 선두주자는 물론 K-팝이다. 그 맨 앞자리엔 BTS(방탄소년단)와 블랙핑크가 놓일 것이다. BTS의 기획제작사 하이브의 방시혁, 블랙핑크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은 모두 70년대생이다. 비, 지오디(god), 원더걸스, 2PM부터 데이식스, 트와이스, 스트레이 키즈 등을 배출한 JYP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도 동세대다. 박진영은 최근 이재명 대통령으로부터 장관급인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됐다. SM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 이수만을 제외하고는 박진영, 양현석, 방시혁 등은 모두 1987년 민주화 이후 청년기를 보냈으며, 서구 대중문화에 우리 시장이 폭넓게 개방된 시기에 연예계 활동을 본격화했고, 정보통신산업의 고도화 속에서 사업을 확장했다.

범위를 넓히자면 영화·드라마에선 ‘기생충’의 봉준호,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지옥’ ‘얼굴’의 연상호 감독 등도 모두 50대 전후다. 노벨문학상으로 K-붐의 영역을 확장한 한강 작가 역시 같은 세대다. 매기 강 감독이나 다수의 한국계 미국 감독, 에미상 수상작인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 작가까지 포함하면 40대까지 두터워진다.

K-컬처 주역들의 세대를 굳이 거론한 것은, 지금이야말로 지속가능한 K-붐을 위해선 ‘다음 세대’, 즉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창작자와 소비층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될 때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지금의 주역들이 40~50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은 이들이 창작하고 생산하는 콘텐츠가 이들이 겪은 공통의 역사적, 사회적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창작자 개개인을 세대집단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들은 ‘경계’에 대한 모종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체성과 상상력은 그 경계의 역사성과 사회성에 한 뿌리를 대고 있다는 것이다.

‘K-붐’은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타고 무수한 경계를 가로질러 온 ‘호랑이’, 국경을 넘어 가서야 미처 예기치 않게 마주칠 수 있었던 ‘호랑이’일지 모른다. 그것은 ‘케데헌’의 ‘더피’, 이날치밴드의 ‘범’, 한강의 ‘소년’, 봉준호의 ‘기생충’, 황동혁의 ‘오징어게임’, ‘어쩌면 해피엔딩’의 헬퍼봇, ‘킹덤’의 갓 쓴 좀비, 로제의 ‘아파트’ 일 수도 있다. 그것은 서구 기원의 장르에 새긴 대한민국, 한국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제 지속가능한 ‘K-붐’을 위해선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정치 양극화와 젠더·세대 갈등이 심화된 ‘포스트 민주화’ 시대, 인공지능(AI) 대전환의 ‘포스트 산업화’ 시대, 젊은 세대가 규정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K-붐’의 필요조건은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다. 이와 함께 정부의 정책적·재정적 지원은 다국적화되는 투자·제작·배급에 맞춘 대규모 상업 콘텐츠 시장과, 실험과 창의성을 북돋을 독립영화·인디음악 등의 생태계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최적의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영상·음악·관광·음식 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케데헌’의 사례처럼 영역·장르별 협업도 민관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자칫 상업, 대중문화에 밀릴 수 있는 전통예술과 순수문화에 대한 지원 역시 더 과감하게 확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젊은 창작자와 기획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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