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세계 오페라의 심장을 지휘하다 [김성록의 클래식 이야기]
고요 속 격정, 세월을 관통하는 울림으로 이어져
(시사저널=김성록 클래식 해설가)
2025년,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기록이 새겨졌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2027년부터 세계 최고 권위의 오페라 극장인 이탈리아 라 스칼라의 음악감독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동양 출신 지휘자에게 좀처럼 문을 열지 않았던 라 스칼라는 이번 인사를 통해 동시대 가장 신뢰받는 마에스트로 중 한 명을 선택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음악감독 임명으로 정명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빈 국립오페라극장을 거쳐 마침내 라 스칼라 무대에 자신의 음악을 새기게 됐다. 이로써 그는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을 모두 지휘한 동양인 최초의 지휘자로서 다시 한번 세계 오페라의 심장부에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가족의 뿌리에서 피어난 음악, 세계를 향한 울림
정명훈의 지휘는 격렬함보다는 침잠에 가깝다. 그는 결코 지휘대 위에서 과장된 동작을 보이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면 언제나 검은 정장 차림에 조용한 손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눈빛과 호흡으로 소리의 깊이를 조율한다. 리허설에서도 음악의 외형보다는 내면을 강조하며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적 참여를 이끌어낸다.
그의 음악은 격정적이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프랑스 음악의 섬세한 색채감, 독일 악파의 철학적 깊이, 러시아 음악의 서사적 밀도까지 자유자재로 소화해 낸다. 한 인터뷰에서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에 그는 "오늘 연주할 곡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대답했다. 연주마다 음악과 진심으로 완벽히 교감하려는 그의 자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감동적인 대답이다. 좋아하는 작곡가로는 베토벤과 베르디를 꼽았다. 베토벤에 대해서는 자유와 해방의 음악가로서 음악적 사명과 인류애의 메시지를 전하는 힘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고, 베르디에 대해서는 오페라의 극적인 힘뿐 아니라 자선활동과 인도주의적 삶의 태도에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정명훈이 클래식계의 세계적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가족, 그중에서도 어머니 이원숙 여사의 헌신적인 사랑과 교육철학이 큰 밑거름이 됐다. 이원숙 여사는 자신이 쓴 책 《통 큰 부모가 아이를 크게 키운다》에서 지나친 조기 교육보다는 자녀의 개성을 존중하고, 필요할 때 과감하게 기회를 열어주는 양육 방식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녀는 일곱 자녀 모두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하지만 이는 전공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양을 위한 것이었다.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에 흥미를 보이는 자녀에게는 그 선택을 존중하고 적극 지원했다. 피아노보다 첼로에 관심을 보인 정명화에게는 첼로를, 바이올린에 끌렸던 정경화에게는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던 정명훈이 지휘자의 길을 가고자 했을 때도 이원숙 여사는 아들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가족의 음악적 전통과 상호 존중의 정신은 '정트리오'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웠다. 피아노의 정명훈, 바이올린의 정경화, 첼로의 정명화-세 남매는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동시에 함께 연주하며 음악적 경이로움을 만들어냈다. 정트리오는 2004년 어머니의 86세 생신을 기념해 특별한 음악회를 열었고, 2011년에는 어머니를 기리는 추모 공연으로 그 사랑과 존경을 음악으로 되새겼다.

노장의 품격…세월을 지휘하는 거장
이미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로 자리 잡은 정명훈은 여전히 피아노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간직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로 출발한 그의 음악 여정은 지휘자로 이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며 음악과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감각을 되살린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토벤의 삼중협주곡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피아노 독주자이자 지휘자로서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삼중협주곡은 피아노·바이올린·첼로, 세 개의 독주 악기가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독주자 간 기교적인 경쟁이나 오케스트라와의 대립보다는 서로의 소리를 듣고 경청하고 조율하며, 함께 만드는 음악의 이상을 그려냈다. 각 악기는 주도권을 나누며 대화하고, 오케스트라는 이 흐름을 감싸안는다. 이러한 구조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대상이 아닌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유기체로 여기는 정명훈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정명훈은 이 곡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시에 지휘를 맡아, 연주자와 지휘자가 하나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음악은 대립이 아닌 경청, 조율, 유기적인 공존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숨 쉬며 그가 음악을 어떻게 듣고 해석하며 함께 나누고자 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미 고희를 넘어선 그는 스스로를 '음악, 연습, 공부, 요리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말한다. 지금도 바보지만, 더 바보였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의 고백에는 세월의 흐름을 속에 쌓아온 단단한 내면과 흔들림 없는 자신감, 노장의 여유가 담겨있다. 한국 음악사의 한 축을 세운 그는, 한국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원로이자 살아있는 유산이 됐다.
그는 노래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오페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더 많은 청중이 오페라를 즐기며, 공연의 저변이 넓어지도록 길을 트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정명훈은 피아노라는 뿌리, 가족이라는 토양, 그리고 라 스칼라 음악감독이라는 세계적 위상을 하나로 엮어낸 입체적인 예술가다. 피아니스트 시절의 섬세함을 지휘봉에 담고, 가족이 쌓아온 음악적 전통을 존중하며 이제는 미래의 예술을 위한 리더로서의 길을 고민한다.
그의 여정에는 언제나 음악과 사랑, 그리고 믿음이 흐른다. 그의 지휘는 단순한 손끝의 움직임이 아니라, 피아노에서 시작된 깊은 울림의 연장선이다. 정명훈은 평범한 지휘자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 문화의 다리를 놓은 예술가다. 그의 음악은 세대를 잇는 언어이며,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연결하는 대화의 매개다.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은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며, 그 울림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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