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 확정 없이는 피해자도 없다? [세상에 이런 법이]

권혜진 2025. 9. 29.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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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 우리가 자주 하고 듣는 말. 네, 그런 법은 많습니다. 변호사들이 민형사 사건 등 법 세계를 통해 우리 사회 자화상을 담아냅니다.
피의자에 대한 무죄추정 원칙과는 반대로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 추정의 원칙이 필요하다. ⓒ시사IN 신선영

무죄추정 원칙이란 유죄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 피의자나 피고인을 무죄로 간주하는 형사법의 기본 원칙이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헌법 제27조 제4항)’라며 헌법에 보장된 권리다.

하지만 이는 형사절차상 형사법 기본 원칙과 권리일 뿐 형사절차를 벗어난 세상만사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아니다. 즉, 무죄추정 원칙이 죄지은 자 또는 죄지었다고 의심받는 자의 사회적 방패막이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형사절차가 아닌 민사재판에서는 관련 형사사건 유무죄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재판 결론이 나기도 한다. 가령 이런 경우다. A는 B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해 형사고소를 했다. 경찰의 기소 의견 송치 이후 피의자 B의 이의신청으로 해당 사건은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수 있다). A는 B의 행위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입었고 마냥 형사사건 결과만 기다릴 수 없어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형사사건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민사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를 통해 B의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신속히 A에 대한 손해배상 결정을 내려 피해보상이 이행되도록 했다.

해당 재판부는 B의 형사사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재판 기일 진행을 미룰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속한 피해보상을 통한 피해자 구제를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일종의 민사재판을 통한 정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무죄추정 원칙은 형사절차상 기본 원칙일 뿐, 피해자의 고통 앞에 우선해 피의자를 보호하는 것이 정의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억울한 피의자가 없는 게 정의일 수 있으나, 억울한 피해자가 없는 것이 가장 평범한 정의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무죄추정 원칙을 죄지은 자들의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피해자들을 분리하고 보호하는 일련의 조치는 형사절차가 아님에도 ‘아직 피의자가 유죄판결을 받지 않은 상태’라며 무시되거나 유보된다. 마치 확정된 유죄판결이 없는 이상 확정된 피해자도 없다는 식이다.

공정성을 가장한 2차 가해

심지어 피해자들의 피해 호소에 대해 저의와 그 취지조차 의심받기도 한다. 결국 많은 피해자는 사회로부터 피해를 인정받기는커녕 그 피해를 호소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만다. 확정된 유죄 없이는 확정된 피해자도 없다는 무지무법(無知無法)의 태도 속에 피해자 상처는 중복되고 누적된다. 흔히 말하는 2차 가해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성범죄나 직장 내 괴롭힘 사건처럼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우열 관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쉽게 발생한다. 피해자가 우선 보호받아야 할 당위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사건 진상을 먼저 확인하겠다며 공정성을 가장한 2차 가해로 변질된다. 공정을 가장한 덫에 걸린 대중은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라는 답을 찾는 게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 착각한다. ‘지금 이게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핀잔도 등장한다. 대중은 진실을 좇는 것이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 착각하고 피해자의 상처를 파헤치며, 가끔 우리 사회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서 피해자에게 등을 돌리기도 한다.

피해자를 가해자처럼 대하는 이러한 폭거 속에 ‘내가 왜?’ ‘내가 어떻게?’라는 자문자답이 반복되고 피해자들은 도망간다. 운이 좋으면 몇 년 후 가해자의 유죄가 확정되고 합의금 몇 푼을 겨우 손에 쥔다. 일부는 가해자 또는 가해자 측의 권력과 싸우는 것이 두려워 고소를 취하하기도 한다. 두 과정 어디에도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구제는 없다. 과연 정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형사절차상 피의자에 대한 무죄추정 원칙과는 반대로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 추정의 원칙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피해를 주장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법과 규정이 정해놓은 피해자 보호 절차가 즉각 가동되어야 한다. 최소한 피해자가 주장한 내용이 허위라는 입증이나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피해자 손해는 추정되어야 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구제 절차가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 조치를 시작으로 피해자를 위한 견고하고 안전한 울타리를 세우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선행 조치일 터이다.

억울한 피의자가 없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억울한 피해자도 없어야 한다. 확정된 가해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무수히 많은 확정된 피해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권혜진 (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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