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어수웅] 강제 피임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부 동거실을 배정받았어요. 낳으면 안 되니까, 그전에 정관수술을 받도록 했지요. 그래도 아이가 생기면 낙태 수술을 받지 않을 도리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 한센병(문둥병) 환자들의 생육 권리를 빼앗는 국가의 강제 불임과 낙태 수술을 차분하게 고발한다. 2017년 대법원은 국가의 위법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끔찍했던 비극의 이면에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우생학(優生學)이 있다.
▶우생학의 뿌리는 영국의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1822~1911)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찰스 다윈의 사촌인 골턴은 다윈 진화론을 인간에게 적용해 인류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월한 유전자의 출산을 장려하고 열등한 유전자는 억제하자는 것이다. 20세기 후반까지도 우생학은 최첨단 과학이었다. 학자와 정치인은 물론, 대중까지 심취했다.
▶흔히 나치 독일을 먼저 떠올리지만, 국가 차원에서 법률로 제정해 실행에 옮긴 나라는 미국이 먼저였다. 1907년 인디애나주를 시작으로 30주 이상에서 ‘단종법’을 통과시키고 정신질환자·범죄자·빈곤층의 강제 불임을 시행했다. 대법원까지 “3세대에 걸친 바보를 만들 순 없다”며 우생학 불임수술을 합법화했다. 극단적 인종주의와 결합한 독일 나치는 유대인·집시·동성애자를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며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 일본도 1948년부터 1996년까지 ‘우생보호법’의 이름으로 1만6000명 넘게 당사자 동의 없는 강제 불임수술을 강행했다.
▶고전적 우생학의 과학적 근거가 폐기되면서 반전의 계기가 마련됐다. 현대 유전학은 정신적 능력·범죄 성향·가난과 같은 복잡한 사회적 특성까지 단일 법칙으로 유전된다는 유전 결정론을 부정한다. 수많은 유전자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2000년대 이후 주 차원에서 사과와 배상에 나섰고, 일본도 지난해 최고재판소가 우생보호법 위헌을 확정한 뒤 당시 기시다 총리가 사과했다.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1953년 정식 영토로 흡수하면서 인구 조절이라는 명분하에 원주민 이누이트족 여성 4500여 명의 자궁에 피임 장치를 삽입했다. 엊그제 덴마크 총리가 그린란드를 찾아가 강제 피임을 사과하고 배상을 약속했다. 일각에선 그린란드를 넘보는 트럼프에 맞서 주민들의 이탈을 막으려는 위선 아니냐는 냉소적 시각도 있다. 그런 반인륜적인 행태가 불과 얼마전까지 벌어졌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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