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안보이는 관세협상… 3500억달러 타결 가능할까
향후 전망 ‘먹구름’… 한미동맹도 큰 변화 가능성
李-트럼프, 10월말 경주APEC 대타협 여부 주목

한미 관세 후속 협상이 미국 측의 ‘현금 3500억달러(약 494조원) 선지급’ 요구로 난항을 겪고 있다. 시장은 얼어붙었다. 국내 금융·외환시장 불안 심리도 고조되는 모습이다. 이재명 정부는 현금 일괄 투입은 불가하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며 대체수단을 중심으로 협상 전선을 재정비하고 있다. 강대강 대치가 계속되면서 한미 동맹관계에도 이상 기류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8일 대통령실과 관계부처 등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한국 정부에 3500억달러 규모의 직접 투자를 요구하고 선불·투자액 증액까지 언급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속도가 늦어진 후속 관세 협상에 우려하고 있지만, ‘국익 중심’ 기조를 바탕으로 미국 측 주장에 대해 ‘불가론’을 확실히 하는 모양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미 3500억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에 대해 ‘상업적 합리성’을 강조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27일 “(3500억달러 선불은) 객관적·현실적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라고 못 박았다. 그는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과의 접촉에서 이 같은 입장을 전달했고, 차기 한미정상회담 시점을 목표로 결과 도출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도 같은 날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의 회동에서 “업적 합리성을 보장하고 특히 실현 가능한 방식으로 (대미 투자 패키지가) 운영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결국 한미 양국의 국익에도 부합한다는 부분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선불’ 요구는 국내에서 역풍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 정부가 현금 불가를 고수할수록, 외환·금융 안정을 지키는 선택이라는 명분이 강화된다. 여야 경제통 다수가 ‘현금 불가·통화스와프 필요’에 교집합을 보이며 한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은 상대적으로 작다는 평가다.
문재인 정부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동연 경기지사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판 플라자 합의는 안 된다”며 “사실상 미국 영구채권을 사라는 것과 다름없다. 회수가 불가능한 구조에 투자할 수는 없다”고 현금 일괄 조달의 비현실성을 경고했다.
여권 내에서는 친명계가 공개적으로 ‘선불’ 요구를 비판하며 정부의 ‘현금 불가’ 원칙에 정치적 우산을 제공했다.
더불어민주당 내 강성 친명(친이재명)계 원내외 인사의 모임인 더민주혁신회의는 27일 논평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정도가 있다”며 “무도한 관세 협상으로 국민주권을 훼손하는 미국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지적했다.
금융시장의 불안 요인은 ‘현금 선지급’ 가능성 자체다. 정부가 원칙을 분명히 하고 현금 대체수단을 관철할수록, 외환유출 우려는 줄어 환율 안정 요인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협상 불가론을 고수할 경우 일부 관세 추가 압박의 위험이 있지만, 수출이 회복 국면인 점 등 완충 장치를 고려하면 ‘관세 비용’은 감당 가능한 단기 비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대통령이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할 요인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다음 달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한미 관세 협상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이재명 정부가 대미 관세협상에 물러설 수 없다는 강한 입장을 표명한 만큼 국민 여론도 이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미국 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전통적인 한미동맹 관계를 훼손할 경우 미국이 입는 정치적·경제적 손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에게 남은 과제는 ‘현금 선지급 불가’ 원칙을 지키면서도 관세 충격을 완화하고, 새로운 한미동맹 틀을 설계해내는 일이다. 강대강 국면 속에서도 경제·안보를 아우른 균형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느냐가 향후 협상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 안보 중심의 동맹 시대가 저물고, 경제와 안보를 아우르는 새로운 한미동맹 질서를 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평가다.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제시한 ‘END’(교류·정상화·비핵화) 구상도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이는 비핵화 포기론이 아닌 중단→축소→폐기로 이어지는 단계론을 재확인한 구상으로, APEC에서 인공지능·에너지·공급망 협력 패키지와 결합할 경우 협상의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과 중국을 한반도 논의 테이블로 끌어들이고, 경제·안보 패키지를 병행해 동맹 불안을 최소화하는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최근 발언은 북한의 핵능력 현실을 직시하되, 단계적 동결과 축소를 통해 긴장을 완화하겠다는 접근에 가깝다. 추가 핵물질 생산 등을 막는 것만으로도 당장의 안보 이익이 있다는 설명은 사실상 ‘현실적 관리론’으로 해석된다. 이 대통령이 동시에 국방예산 증액 필요성을 언급하며 “자주적 방위력”을 강조한 것도, 변화하는 동맹 질서 속에서 한국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신호로 풀이된다.
한미간 관세협상이 상당 기간 팽팽하고 지리한 줄다리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이유다.
안소현 기자 ashright@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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