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무대 EPL, 박지성-손흥민 계보 누가 이을까
‘젊은 피’ 김지수·양민혁·윤도영·박승수는 아직 성장 중
(시사저널=서호정 축구칼럼니스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이하 EPL)는 유럽 축구 5대 리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인기와 상업성을 자랑한다.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맹활약하는 한국 선수의 등장은 곧 대한민국 축구의 경쟁력 강화와 인기로 이어졌다. 당대 최강의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일원으로 무수한 트로피를 들어올린 박지성은 은퇴 후 '해버지'(해외 축구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5년 토트넘 홋스퍼에 합류한 손흥민은 무려 10년 동안 EPL에서 월드클래스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EPL 득점왕에 등극하고 팬덤이 강한 빅클럽에서 레전드 칭호까지 얻은 손흥민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때마침 국내 스포츠 중계권 시장엔 유료화 바람이 불었고, 손흥민과 토트넘을 비롯한 EPL 경기를 보려면 매달 만원이 넘는 유료 결제를 별도로 해야 했다. 이른바 '국뽕'(과도한 자국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손흥민의 맹활약은 유튜브를 비롯한 2차 콘텐츠를 생산하는 크리에이터들의 시대도 열었다. 중계 영상을 쓰지 못해서 말로만 하는 소위 입중계와 후속 영상이 대형 유튜버의 탄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8월2일 토트넘과 함께 서울을 방문한 손흥민이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10년간 몸담은 팀을 떠난다는 발표를 하면서 모든 상황은 복잡해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언젠가는 닥칠 '포스트 손흥민' 시대가 불현듯 찾아왔기 때문이다. '해버지'가 만든 국내의 유럽 축구 부흥 1기에 이어, 손흥민의 시대가 만들었던 2기의 종말을 고하는 발표였다.

EPL 등 유럽에서 美 메이저리그 사커(MLS)로 팬들 관심 옮겨가
손흥민이 LAFC를 자신의 새로운 팀으로 결정, 미국 무대로 떠나며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해외 축구를 다루는 포털사이트 뉴스탭이나 손흥민 관련 영상이 빼곡했던 대형 유튜버의 영상 목록에선 이제 LA와 손흥민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EPL은 여전히 리버풀, 맨체스터 시티, 아스널, 첼시, 토트넘 등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지만 주목도는 불과 1개월 사이에 크게 낮아졌다.
무엇보다 박지성, 손흥민의 계보를 이을 한국인 프리미어리거가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 박지성이 2012년 여름 맨유를 떠나 강등권에 있던 퀸즈파크 레인저스(이하 QPR)로 갈 때도 비슷한 우려는 있었지만, 당시엔 이미 EPL에 상륙해 있던 '쌍용' 기성용(당시 스완지시티), 이청용(당시 볼턴)이 준수한 활약으로 공백을 커버했다. 지동원(선덜랜드), 김보경(카디프시티), 윤석영(QPR) 등도 소속팀에서의 경쟁과 출전으로 계속 기대감을 줬다.
그러던 중 2015년 드디어 독일에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던 만 23세의 손흥민이 이적료 약 400억원을 기록하며 바이어 레버쿠젠을 떠나 토트넘으로 왔다. EPL 데뷔 시즌에 발바닥 부상 여파로 적응에 애를 먹던 손흥민은 두 번째 시즌부터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박지성의 뒤를 잇는 한국인 EPL 황금 계보는 이어졌다.
문제는 당장 손흥민이 떠난 현시점에는 이 계보를 이을 선수도, 그 공백을 채울 완충 작용을 할 선수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재 울버햄튼의 황희찬이 유일하게 1군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는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다. 그나마도 황희찬은 한 달 전만 해도 울버햄튼을 떠날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강인, 김민재처럼 유럽 내 다른 리그에서 활약하는 월드클래스급 선수들의 EPL 입성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실제로 두 선수에 대한 EPL 구단의 입질은 있었다. 이강인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 뉴캐슬, 크리스털 팰리스 등과 연결됐다. 김민재는 수비수 보강이 필요했던 뉴캐슬과 첼시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협상 단계로 넘어간 사례는 많지 않았다. EPL 상위권 구단의 레이더망에 두 선수가 있지만 반드시 영입해야 한다는 절박함이나 현 소속팀에 거액의 이적료를 지불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박지성, 손흥민의 뒤를 잇는 EPL 한국인 황금 계보의 다음 주자는 이전과 다른 형태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많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박지성과 손흥민처럼 유럽 내 다른 리그를 지렛대 삼아 EPL의 빅클럽으로 진입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어린 나이에 EPL 구단과 계약을 맺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인하우스 방식의 성공이 다음 대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한범·이태석·배준호·백승호 등 EPL 진입 노려
EPL을 비롯한 유럽 클럽들은 과거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남미와 아프리카 유망주에 집중했다. 그러나 최근 남미와 아프리카의 10대 유망주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새로운 틈새시장을 찾았다. 상대적으로 가성비가 좋은 아시아, 그것도 교육 수준이 높고 성장 잠재력이 큰 한국과 일본의 유망주를 대거 스카우트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어린 선수들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연령도 과거와 같은 20대 초중반이 아닌 18세, 19세로 내려갔다.
현재 EPL에서 뛰고 있진 않아도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선수는 황희찬 외에도 다수가 있다. 2023년 여름 브렌트퍼드에 입단한 김지수, 2024년 12월 토트넘에 입단한 양민혁, 그리고 이번 여름 각각 브라이턴 앤 호브 알비언과 뉴캐슬로 이적한 윤도영과 박승수가 현재 EPL 구단을 원소속팀으로 두고 있다.
이들 중 김지수·양민혁·윤도영은 모두 EPL을 떠나 있는 상태다. 지난 1월 EPL 데뷔에 성공했지만 충분한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판단한 김지수는 이번 여름 독일 2부의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 임대 이적했다. 윤도영은 브라이튼 입단 직후 네덜란드 1부에 속한 엑셀시오르 로테르담으로 임대를 떠났다. 양민혁도 토트넘 입단 후 잉글랜드 2부인 챔피언십 소속의 QPR, 포츠머스로 계속 임대를 다니고 있다.
유럽 3년 차인 김지수는 만 21세이고, 양민혁과 윤도영은 2006년생으로 아직 10대다. 이들을 영입한 EPL 구단들은 장기적 안목을 갖고 긴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당장 원소속팀 1군에서 경쟁하며 출전 기회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경기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2부 리그나 중위권 리그로 보내는 것이다.
다만 박승수의 경우 차별점이 있다. 지난 7월 입단 직후 치른 프리시즌 훈련 동안 뉴캐슬의 에디 하우 감독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주축 공격수의 이적과 부상을 틈타 애스턴빌라와의 개막전 명단에 깜짝 진입하는 성과를 냈지만 결국 출전하진 못했다. 이후 박승수는 뉴캐슬 21세 이하 팀에서 꾸준히 선발 출전하며 1군 재진입을 노리고 있다.
유럽 중위권 리그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으며 EPL 같은 빅리그 진입을 노리는 젊은 선수들도 있다. 덴마크 미트윌란의 센터백 이한범은 올 시즌 개막 후 6경기 연속 풀타임 출전을 하며 기세를 올렸다. 최근 같은 포지션에 새로운 선수가 영입되며 주전 경쟁에 다시 불이 붙었지만 성장세가 가장 가파른 선수다. 오스트리아의 아우스트리아 빈으로 간 레프트백 이태석도 순조롭게 유럽 무대에 적응 중이다. 잉글랜드 2부인 챔피언십은 웬만한 유럽 중위권 리그 이상의 위상을 갖고 있다. 스토크시티의 배준호, 버밍엄의 백승호, 스완지시티의 엄지성은 팀의 승격이나 좋은 퍼포먼스를 통한 이적 등 다양한 방식으로 EPL 진입을 꿈꾼다.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내년 북중미에서 열리는 FIFA 월드컵이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경쟁하는 무대에서 강렬한 활약을 펼치면 그 어느 때보다 선수의 가치와 평가는 급상승한다. 이한범·이태석·배준호·백승호 등은 지난 9월에도 홍명보 감독의 선택을 받아 A대표팀에 소집돼 출전 기회를 얻었다. 현 추세를 이어가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면 내년 여름 EPL에는 새로운 한국 선수들이 입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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