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기 싫은 딸의 마음, 독립의 또 다른 이름 [.txt]
‘카톡’ 훔쳐보고도 사과하지 않는 엄마
사과하기 싫은 딸, ‘심리적 독립’ 욕구

마음돌봄, MZ가 MZ에게
엄마에게 죽어도 사과하기 싫은 30살 직장인입니다. 벌써 열흘째 냉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엄마는 제가 엄마를 부양해주길 바라십니다. 열흘 전도 “엄마 일 그만두면 용돈 줄 거니?”라고 물으셨습니다. 줄 거라고 했는데 제 표정에서 뭘 읽은 건지 대뜸 “주기 싫은 모양이네”라고 넘겨짚었습니다. “허리며 다리며 안 아픈 데가 없다”는 한탄과 “남자친구한테는 명품도 선물하면서 엄마한테 돈 쓰는 건 아깝냐”는 비꼼도 이어졌습니다. 엄마가 제 카톡을 훔쳐봤다는 사실에 화가 나 저도 날 선 말을 퍼부었습니다.
엄마는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빠가 주식으로 큰돈을 날려 엄마가 지금까지도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빚을 갚고 계십니다. 젊은 정교사들이나 교장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아무 말 못 하는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힘든 와중에도 저와 동생이 원하는 학원 수업은 다 등록해 주셔서 저희가 이만큼 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화도 많습니다. 엄마는 선생님들이 뒤에서 애들 가정교육에 대해 얼마나 험담하는지 아냐며 작은 것도 통제했습니다. 글씨를 비뚤게 쓴다고, 공부 못하는 친구랑 어울린다고, 만화책 본다고 많이 혼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싸워서 무섭다는 일기를 쓴 걸 보고는 “선생님이 우리 집을 뭘로 보겠냐”고 찢어버린 후 매일 일기를 검사하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화낼 때마다 저는 늘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별로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아 억울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먼저 사과하기 싫습니다. 제가 엄마에게 심한 말을 한 건 잘못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 카톡을 훔쳐본 걸 사과하지 않는 엄마를 보면 오기가 생깁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마찬가지로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닌데 저 역시 자존심 부리며 사과하지 않고 있어 참 속이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서현(가명·30)
‘미안하다’는 말은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중 하나입니다. 쓸 일이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때로는 별 감흥 없이 자동적으로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흔하디흔한 이 말이 간절할 때도 있습니다. 영화 ‘만추’에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애나는 남편을 살해한 죄로 수감 중입니다. 엄마의 죽음으로 3일간의 외출을 허락받고 참석한 장례식장에서 전 애인 왕징을 만납니다. 애나의 손님으로 찾아온 훈을 견제하는 왕징과 왕징이 비겁하고 뻔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챈 훈 사이에 시비가 붙습니다. 애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보러옵니다. 훈은 왕징이 자신의 포크를 썼다며 어린애들이나 댈 법한 이유를 댑니다. 유치한 싸움은 말리게 마련인데 애나는 말리지 않습니다. 대신 왕징을 매섭게 몰아붙입니다. 왜 남의 포크를 썼냐고. 그 포크는 당신 게 아니었다고. 그런데 왜 사과하지 않았냐고. “왜! 왜!” 하는 애나의 절규에 놀란 왕징은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
애나의 울분은 고작 포크 때문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왕징이 애나를 떠나면서 애나는 폭력적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돌아온 왕징은 애나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약속했습니다. 약속의 날, 왕징은 오지 않고 의처증이 심해진 남편은 애나를 죽도록 때립니다. 기절했다가 일어나 보니 남편은 죽어 있고 애나의 옥살이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사람과 단란한 가정을 꾸린 왕징을 보며 애나는 복잡한 기분을 느낍니다.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왕징에 대한 원망이 컸을 것입니다. 몇번이나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비참함,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다는 절망이 뒤범벅된 감정을 ‘포크’를 계기로 토해내며 사과하라고 따집니다.
어쩌면 서현님도 엄마의 사과에 오랫동안 목말랐을 것 같습니다. 엄마에게는 남들의 시선이 중요했습니다. 세간의 눈을 빌려 서현님을 통제한 엄마는 타자적 시선의 대리인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어떻게 보겠냐’는 말로 내 속에 서서히 감시자를 밀어 넣은 엄마, 일기를 검열하며 내 아지트를 훼손하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엄마의 억압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일단 사과해야 했습니다. 애나가 왕징에게 따진 것처럼 왜 내 영역을 침범했냐고, 그런데 왜 사과하지 않냐고, 나는 엄마의 소유가 아니지 않냐고 소리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먼저 사과하기 싫다’는 마음은 괜한 자존심이 아니라 엄마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일 것 같습니다.
독립을 위해서는 타자의 시선이 아닌 나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글씨체부터 친구를 선택하는 안목, 취향, 진솔한 일기까지 모두 틀렸다는 얘기를 들어온 서현님은 자기 의심에 이미 익숙해져 있을지 모릅니다. 엄마의 틀에 맞추면서 엄마와의 연결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엄마를 배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 사과하던 예전과 달리 엄마에게 사과하지 않는 스스로가 ‘속 좁게’ 느껴지는 것도 무의식적 죄책감 때문일 겁니다. 서현님에게 독립은 배반 혹은 못된 행동과 동의어인 셈입니다.
그래서 더 엄마의 사과가 간절할 것 같습니다. 엄마의 사과는 그동안 서현님에게 제시됐던 정답이 그저 엄마의 기준일 뿐이었다는 인정이자 이제 서현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도 괜찮다는 승인일 테니까요. ‘독립=괘씸한 행동’이라는 사전을 새로 쓸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영화 ‘만추’에서 애나는 왕징의 사과 말을 듣고 뭔가로부터 해방된 듯 목 놓아 웁니다. 서현님도 마음속 결석처럼 굳어버린 분노와 억울함, 독립에 대한 죄책감에서 놓여나고 싶어 엄마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박아름 심리상담공간 숨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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