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다 이루었다, 하지만 다 잃었다"…이병헌이 말하는 '어쩔수가없다'의 의미

김태현 기자 2025. 9. 27.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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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시리즈 2·3, <케이팝 데몬 헌터스>, 한국 배우 최초 토론토국제영화제 특별공로상 수상에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부문 진출까지, 전 세계 영화계를 사로잡고 있는 이병헌. 2025년 최고의 해를 보내고 있는 그는 “무슨 기운이 있나 싶을 만큼” 전례 없는 성과 속에서도 “불안함이 함께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우먼센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전 세계 영화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13년 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을 시작으로 토론토·뉴욕·부산국제영화제를 휩쓸며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부문 한국 대표작으로도 선정된 이 작품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원작 소설을 박찬욱 감독이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한 블랙코미디다. 개봉을 앞두고 예매량 40만 명을 기록하며 올해 한국 영화 중 압도적 예매율 1위를 기록했다.

사진_BH엔터테인먼트

이병헌은 "이 영화 전체가 굉장한 비극"이라며 "첫 대사는 '다 이루었다'지만, 어쩌면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만수의 말은 '다 잃었다'가 아닐까'라고 작품을 해석했다. 25년 경력 제지 전문가에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만수 역할에 대해 그는 "평범한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게 가장 큰 숙제였다"고 털어놨다.

21년 만에 박찬욱 감독과 재회한 이병헌은 "이번 작품에서는 감독님이 제가 낸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했다"며 "21년 전과 달라진 모습에 '감독님도 변했나' 싶었다"며 "제안을 드릴 때마다 수용하셔서 이거 '독박' 쓰는 거 아니야란 생각도 들었다"며 웃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21년 만 재회인데 어떻게 이뤄졌나요.

박 감독님이 미국 작품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던 작품을 딱 꺼내셨길래 '이거는 운명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 사이에도 감독님이 작품마다 같이 하자고 제안해주셨지만 서로 안 맞았거든요. 결국 한국 영화로 다시 만나게 됐으니까요. 작품은 21년 만이지만 그동안 계속 사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어색한 건 없었어요. 감독님은 여전히 스태프들과 배우들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캐치해내려고 하시더라고요.

원작이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이고,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영화로 한 번 만들었던 작품이다. 

박 감독님이 오래전부터 가장 만들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하시더라고요. 제지업이라는 설정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바뀌었고, 만수라는 캐릭터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해서 공장 다니며 방통대로 학사학위를 딴 특수제지 전문가로 설정됐어요. 과거 알콜 문제를 겪었지만 지금은 '다 이루었다'고 느낄 정도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던 평범한 가장이죠.

사진=CJ ENM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웃겨도 되냐'고 물어보셨다는데?

내가 읽은 게 맞게 읽은 건가 싶었어요. 나는 되게 많이 웃었는데, 감독님이 쓰실 때도 의도한 건지 아니면 나 혼자 잘못 읽어서 나만 웃겼던 건지 알고 싶어서 여쭤본 거였어요. 특히 블랙코미디에서는 너무 의도하면 역효과가 나잖아요. 웃기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상황 자체가 재미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절제하기도 해야했어요,

이번에는 감독님이 이병헌의 아이디어를 많이 받아주셨다고.

정말 놀랐어요. 박 감독님은 원래 제 아이디어를 다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달라지신 건가 했는데, 한편으로는 겁도 났어요. 내가 자꾸 장난처럼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지고 '독박' 쓸 것 같아서요. 

제가 의견을 낸 건 아침까지 삽질하다가 미리가 와서 '여보 경찰 왔어' 하며 깨울 때 경찰 앞에서 두 손을 내밀고 '다 말씀드린다'고 하는 장면이에요. 자기 때문에 온 것으로 착각하는 거죠. 감독님이 '그거 너무 재밌다' 하시더라고요. 또 음악실에서 총을 놓고 장롱 안으로 막 벌레처럼 기어들어가는 시퀀스도 제가 제안한 거예요.

 코스튬 디자인이 과하다는 생각도 있다.

초반 분장 테스트할 때 두 가지 버전이 있었어요. 매즈 미켈슨의 완전히 날카로운 앞머리 생머리 스타일과 스티븐 맥퀸의 곱슬머리 스타일.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이었거든요. 결국 스티븐 맥퀸 버전으로 결정됐는데, 콧수염까지 붙이고 하와이안 셔츠 입고 카메라 테스트했을 때는 정말 남미 마약왕 같더라고요. 그 모습이 너무 강력해서 이야기에 집중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나중에 베니스에서 재미있는 리뷰를 읽었어요.

사진=CJ ENM

어떤 리뷰였나.

그 콧수염 때문인지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이 연상된다는 거였어요. 기계화되고 획일화된 공장에서 허둥지둥하는 채플린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AI화된 시스템에 적응 못하고 갈 길을 잃은 만수의 표정이 겹쳐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감독님께 '애초에 그런 생각이 있으셨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래요. 우연의 일치였던 거죠.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 최초로 받는 거라고 해서 정말 영광이었어요. 베니스에서 토론토로 넘어가면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을 실감했어요. '오징어 게임' 때보다 강도가 훨씬 더 컸거든요.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손예진의 '사랑의 불시착' 등 배우 각자의 개별 작품들로 팬이 된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렇게 출연한 배우들의 각자 팬들로 커져가는 규모를 느꼈어요. 한국 콘텐츠가 정말 어마어마해졌구나 싶었어요.

이 영화를 다섯 번이나 봤다고 들었다.

다섯 번을 봤어요. 박 감독님 영화라 그런지 다섯 번을 봐도 달랐어요. 특히 마지막을 용산 아이맥스에서 봤는데 완전히 몰랐던 감정들까지, 배우들의 세밀한 표정이 다 보이니까 아이맥스용 영화가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보는 재미가 또 다르구나 싶었어요. 박 감독님 영화라서 더 그런 건가 싶은데, 여전히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이니까 신기해요.

만수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했나. 

이 영화 전체가 굉장한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권선징악이 없는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완전한 비극이에요. 이미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영혼이 다 망가져버린 상황이거든요. 서로 표현도 못하고, 언제 미리가 아이들과 함께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고요. 첫 대사는 '다 이루었다'지만, 어쩌면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만수의 말은 '다 잃었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수가 경쟁자들을 제거한다는 극단적 선택에 대해 처음엔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촬영 내내 감독님과 제일 많이 한 이야기가 그 부분이었어요. 해고당했다고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살인이라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일인가 하고요. 감독님도 설득력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셨어요. 영화적 설정이기 때문에 최대한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려고 배우로서는 더 처절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보이려고 애썼어요.

사진=CJ ENM

촬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처음 면접 보는 장면이 정말 숙제 같았어요. 지문이 '햇빛 때문에 불편해서 어두운 곳으로 옮기면서, 갑자기 허리 통증이 몰려와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가 사람들 의식해서 다시 목만 만지며 손을 내리고, 불안해서 다리가 떨리는데 손으로 눌렀다가 다시 떨리기 시작하고' 이런 식이었어요. 이 모든 걸 대사와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장면은 두 테이크로 끝냈어요.고민이 많았기 때문인지 막상 쉽게 끝났죠. 그리고 아라한테 쫓기면서 차에서 혼자 계속 소리 지르는 장면도 정말 많이 웃었어요. 며칠 동안 웃었던 것 같아요. 편집실 친구한테 가서 다시 한 번 보여달라고 할 정도였거든요.

부부싸움 장면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나온다. 

그건 현장에서 생긴 거예요. 원래는 '너는 공평하게 모든 사람한테 개니까'라고 얘기하면 제가 다음 대사를 치는 거였는데, 갑자기 감독님이 '그 대사 말고 진짜로 한 번 짖어봐'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하라는 거예요. '어차피 이 테이크 안 쓰시겠지' 하고 장난으로 한 번 해봤어요. 감독님도 '이건 안 쓸 것 같다. 근데 꼭 시켜보고 싶었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영화에는 그게 들어 갔어요. 여러 번 가지도 않았거든요.

손예진씨와의 호흡은 어땠나.

어떻게 아직 호흡을 한 번도 안 맞췄을까 싶더라고요. 작품은 처음이지만 가끔 보는 사이였고, 아내와 같은 회사 친구이기도 해서 편안함이 있었어요. 첫 촬영 시작하고 '왜 손예진 손예진 하는지' 단번에 느꼈어요. 박찬욱 감독이 이렇게저렇게 요구하는 것에 모두 맞춰서 연기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부부 싸움할 때 손예진 씨의 연기가 너무 좋았어요.

사진=CJ ENM

고용 불안을 느끼는 만수와 이병헌의 삶은 너무 다르지만 연기 표현이 어느 때보다 완벽하다는 평가가 들린다.

꼭 경험해본 것만 연기할수는 없고, 그런 경우도 흔치 않아요. 제가 <케데헌> 귀마를 경험해보고 연기하진 않잖아요(웃음) 현실에서 겪었던 불안, 공포, 분노를 잘 포착해서 극대화하거나 재가공해서 연기로 표현하는 거죠. 제가 만수와 직접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긴 어렵지만, 간접적으로는 많이 경험하고 있는 일들이에요. 감독이든 배우든 한 작품 끝나고 다음 작품까지는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거든요. 주변에는 그런 상황에 있는 동료들이 정말 많아요. 그 시간이 길어지면 잠시동안의 실직과 마찬가지고요. 

영화 속 만수처럼 AI가 영화계에도 몰아 닥치고 있다. 

이미 현실이 된 문제예요. 동료가 어떤 영상을 보여줬는데 '이건 언제 찍었냐'라고 묻자 '찍은 적 없다'며 AI라고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제 AI 영상도 봤는데, '오징어 게임' 때 저와 이정재 씨 브로맨스 영상을 보다가 '언제 찍었지?' 했다가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에서 놀랐어요. 처음엔 신기했지만,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극장 산업의 위기에 대해서 많은 목소리가 나온다.

만수가 몸담고 있던 제지업이 종이 쓰임이 거의 없어지는 산업이잖아요. 지금 극장이 딱 그런 상황 같아요. 영화는 스트리밍을 통해서라도 계속 만들어지지만, 극장 산업은 정말 위기죠. 시급하게 관객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예요. 주변에서도 많은 얘기들이 나오지만 해결책은 없어요. 진짜 좋은 극장에서 봐야만 100% 느낄 수 있는 좋은 영화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까요.

<오징어게임>,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 흥행 성적이 정말 좋다. 작품 선택 기준이 있다면.

기본적으로 제가 재미있게 읽었느냐가 가장 중요해요. 예외적으로 지.아이.조(G.I. Joe) 같은 경우는 계속 거절했었거든요. 미국 매니저가 계속 들이밀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고 해서, 박찬욱 감독님과 김지훈 감독님께 전화해서 조언을 구했어요. 박 감독님은 '하면 어떻겠느냐' 쪽이었고, 김 감독님은 '그걸 뭘 해' 쪽이어서 더 고민의 늪으로 빠뜨린 상황이었죠. 그렇게 조언도 구하지만 결국 내가 재밌냐, 하고 싶냐가 중요해요.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처음엔 제목이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했어요. 4-5년 전 소니 픽처스와 미팅했을 때는 완전 초기 단계였거든요. 그때 첫 미팅이 끝나고 '안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한류 큰 축인 한국 아이돌의 원류가 퇴마사에서부터 유래했다는 설정이었어요. 또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자'는 마음에 시작했는데, 지금 보니까 잘한 것 같아요.

사진=BH 엔터테인먼트

초등학생인 아들의 반응은 어떤가.

케데헌 볼 때 처음엔 기대하고 같이 봤는데 '아빠는 어디 있냐'고 하더라고요. '아빠는 불이야'라고 하니까 '귀마 편을 들면서 봐야겠다'고 했지만, 귀마를 응원할수가 없거든요. 귀마는 절대 악이니까요. 결국 끝까지 보고 아들이 약간 실망하더라구요. 생각해보면 아들이 커가면서 영화를 같이 볼수 있는 시기에 맡는 역할이 대부분 빌런이더라고요. '아빠는 빌런 전문 배우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오징어 게임>, <케데헌> 등 한류가 계속되고 있다. 한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과거의 시행착오를 돌아봐야죠. 20년 전 한류가 처음 시작될 때 한류 팬 취향에 맞춰서 사랑 이야기 같은 아류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게 한류를 빨리 시들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어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홍콩 영화에 열광할 때 마지막은 느와르만 쏟아져 나왔고 그게 홍콩 전선기의 마지막이었어요. 남이 뭘 좋아하는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했던 대로 마음대로 하면 그들은 그런 다양성과 의외성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올해가 특별한 해가 된 것 같은데, 개인적인 소감이 있다면. 

요즘은 나를 위로 올려주는 무슨 '기운'이 있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어떤 큰  기운이 있잖아요. 전 세계적인 현상을 불러일으키니까 사실 되게 당황스러워요. 너무 행복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함도 함께 있어요. <어쩔수가없다> 영화가 '다 이루었다'로 시작해서 결국 '다 잃었다'로 끝나는 거 아니에요? 그런 비극처럼,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나서 사람들이 여전히 보고 싶은 배우로 계속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당연히 있죠.

아카데미상(오스카) 진출에 대한 기대는?

진짜 오스카 후보가 된다면 그 자체로 영광일 것 같아요. 인생에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영화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어마어마한 영광과 기회인데, 만약 후보가 된다면 오스카 레이스를 열심히 해야겠죠. 간접 경험만 했지만, 쌍코피가 터질 정도로 열심히 하는 것도 결과를 좌지우지한다고 하더라고요.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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