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죽을 수 없어" 혈뇨 보며 감행한 여성 고공 농성이 바꾼 것들
강주룡,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 고공농성
여성노동자 동맹파업, 항일운동으로 발전
재능교육 농성, 특고 근로자성 기준 마련
여성노동의 열악한 노동환경 보여주면서
전체 노동자들의 삶 바꾼 '분수령' 역할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합니다.

일제가 한반도 식민지 수탈에 열을 올리던 1931년 5월 31일. 평양 소재 평원고무공장 여공이었던 강주룡이 을밀대(고구려 평양성의 누대 중 하나) 지붕에 올랐습니다. 무명천을 찢어 밧줄을 만들어 곡예하듯 지상 12m 상공으로 올라간 주룡은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고공농성입니다.

사건은 1930년 8월 초 회사가 노동자들의 임금 17%를 일방적으로 삭감하면서 시작됩니다. 주룡은 임금삭감에 반발, 여성노동자들의 동맹파업과 투쟁을 주도했는데요. 그는 경찰에 쫓기던 끝에 을밀대 지붕에 올라 억울함을 소리쳤습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고공농성은 8시간 만에 경찰이 주룡을 끌어내리면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주룡은 그해 8월, 평양의 빈민굴에서 30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지요.
하지만 그의 죽음은 어느 가여운 여성노동자의 비극적 삶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 여성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항일운동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펼쳐질 여러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여성노동자의 간절한 외침이 세상을 바꾼 셈입니다.
학습지 교사의 고공농성, 특고노동자 '근로자성' 인정받다

노동현장에선 여전히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고공농성에 나서고 있습니다.
학습지 교사 여민희(52)씨는 2013년 2월 6일 오전 8시 30분 동료 학습지 교사 오수영씨와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성당 종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사건은 2007년 12월 21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민희씨가 다녔던 재능교육은 학습지 교사에 대한 수수료 정책을 바꾸겠다고 통보했는데요. 새로운 수수료 정책을 도입하면서 학습지 교사들이 임금 대신 받는 수수료가 월 10만~100만 원 낮아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학습지 교사들이 반발하며 농성을 벌이자 사측은 단체협약을 해지하고 노조 조합원 12명을 해고하는 강수를 둡니다. 2,075일간 이어진 최장기 비정규직 농성, 재능교육 사태가 벌어진 거죠.
민희씨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고공농성을 위해 성당 종탑에 오르던 때를 떠올리며 "사람이 죽어야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 누군가 죽는 것을 볼 수는 없어서 종탑에 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기약 없는 종탑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민희씨는 "종탑 난간이 발목 높이도 안 됐는데 비를 피하려고 비닐 천막을 치다 발을 삐끗해 떨어져 죽을 뻔한 적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제한된 공간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상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찌는 듯한 여름에는 혈뇨가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하는데요. 민희씨는 "체력적, 정신적으로 힘들다보니 나중에는 여기서 그냥 이렇게 죽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민희씨의 고공농성은 2013년 8월 26일 202일 만에 끝났습니다. 사측이 일방적으로 해지한 단체협약을 다시 체결하고 해고된 여성노동자 12명을 모두 복직시키기로 약속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202일은 세상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당시 학습지 교사들은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는데요. 고공농성 이후 노조와 사측이 꾸준히 단체협약을 유지하면서 근로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 법원이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으로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는데요. 민희씨의 목숨을 건 고공농성이 학습지 교사, 나아가 특고 노동자 전체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죠.
불탄 공장 옥상 위 여성노동자, 외투기업 먹튀 방지 요구하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여성노동자 박정혜씨는 2024년 1월 8일부터 불타 버린 공장 옥상에서 600일간 고공농성을 벌였습니다. 한국옵티칼은 일본 기업 니토덴토의 한국 내 자회사인데요. 회사는 경북 구미 소재 공장이 불타자 생산물량은 한국 내 또 다른 자회사 한국니토옵티칼로 옮겼지만 노동자들은 해고했습니다. 구미산단 땅을 무상으로 임대받고 여러 세제 혜택까지 누렸지만 고용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죠.
정혜씨는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불탄 공장 옥상에 올랐고 옥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철제 사다리를 스스로 제거했습니다. 지난 4월 고공농성장에서 만난 정혜씨는 "(회사가) 자회사 공장으로 생산물량은 이전하면서 노동자 고용을 승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며 "회사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오랜 고공농성은 외국계투자기업의 먹튀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회적 관심을 끌게 됐고 정치권으로부터 '외투기업 먹튀 방지법' 제정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여성노동자 리더십 크게 성장

이 외에도 2005년부터 사측의 불법파견과 부당해고에 맞서 1,895일간 싸우며 여러 차례 고공농성을 벌였던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 2010년 12월 한진중공업의 생산직 근로자 400명 정리해고에 반발해 309일간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노동자, 2019년 한국도로공사의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톨게이트 구조물 위로 올라간 톨게이트 수납 여성노동자들이 있었지요. 이들은 모두 불법파견과 부당해고, 직접고용 문제라는 사회적 화두를 던진 노동운동으로 평가받습니다.
노동계는 여성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이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선 여성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업종의 불안정한 고용 상황과 낮은 임금 등 열악한 노동환경이 드러나는 사건들이 많다고 하는데요.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기륭전자 노조, 톨게이트 노동자,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모두 여성들이 주로 일하는 업종의 불안한 고용 형태와 낮은 임금문제 등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목숨 건 싸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의 고공농성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앞선 사례들에서 보여지듯 그들의 목숨 건 투쟁은 모든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지요. 최근에는 노동계 안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의 입지가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김 국장은 "노동자를 조직하고 불합리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데 여성들이 더 주도적이고 큰 성과를 내고 있다"며 "여성노동자들의 리더십이 크게 성장했음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고무공장 여공 주룡이 을밀대 지붕에 오른 지 94년이 흘렀습니다. 긴 시간이 지나 또 다른 주룡의 모습으로 고공농성을 펼쳤던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민희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성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은 소외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는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우린, 세상을 바꿨습니다."
송주용 기자 juy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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