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웅은 아니지만,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이야”[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Take Down! 뚝섬한강공원

케데헌은 외국인의 서울 관광 패턴을 바꾸고 있다. 그동안은 경복궁 청계천 종로 홍대 같은 구도심과 젊은 상권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잠실주경기장과 롯데타워, 뚝섬한강공원과 청담대교, 경동시장, 낙산공원, 국립중앙박물관 등 케데헌에 나온 곳을 성지순례하듯 여행한다.

평일에도 많은 외국인이 뚝섬한강공원을 찾는다. 국내 유일 복층 교량인 청담대교는 케데헌에서 헌트릭스 3명이 지하철을 타고 악귀들과 싸우던 장소다. 관광객들은 청담대교 아래 한강 둔치 계단에 앉아 지하철이 위로 지나갈 때마다 휴대전화를 치켜들고 사진을 찍었다.
청담대교 장면에서 흐르는 노래는 ‘테이크다운(Take Down)’. 강렬한 박자에 카리스마 넘치는 가사가 압권이다. ‘이제 너희를 걷어차 밤으로돌려 보낼 시간이야’ ‘고통 속에서 산산이 조각낼 거야!’ ‘너희들은 울며 애원하겠지만 결국 다 쓰러질 거야!’
그러나 헌트릭스 리더 루미는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악귀를 제거하는 헌터이면서 악귀 문양을 몸에 지닌 이중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악을 소멸시켜야 한다면 자신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루미는 아팠다. 중요한 신곡 발표를 앞두고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경을 쓴 HAN의사는 루미에게 “부분을 치료하려면 전체를 이해해야 하는 법”이라며 “벽을 겹겹이 쌓았군요”라고 말한다. 루미가 목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속 비밀’ 때문에 벽을 쌓은 사실을 간파한 것. 김호산 서울한방진흥센터장은 “HAN의원 에피소드는 부분적 증상 보다는 몸의 균형이 깨져 병이 생기는 근본 원인을 찾고, 개인에 맞는 치료를 하는 한의학의 본질을 세계에 알렸다”고 말했다.
이곳 한의약박물관에서는 조선 궁중 내의원 의관과 의녀 복장으로 갈아입고 한방 역사를 담은 전시를 볼 수 있다. 외국인에게는 약초를 넣은 족욕 체험이 가장 인기다. 한방 마사지, 한방 뷰티, 약선 음식, 한방 카페도 빼놓을 수 없다. 스트레이키즈와 트와이스 팬이라는 일본인 미하루 씨는 “간호학을 전공하는데, 케데헌을 보고 한의학에 관심이 생겨 찾아왔다”고 했다.
● 낙산공원, 한양을 지키는 ‘황금 혼문’
‘우리 노래 부르리라. 굳건한 이 소리로 이 세상을 고치리라.’
케데헌 오프닝에서는 국악이 흐른다. 무속인 복장의 세 여성이 태극 문양을 연상케 하는 춤선을 선보이며 악귀를 무찌른다. 케데헌은 한국 문화와 동양철학에 현대인의 외로움까지 담아 어른도 사로잡는다. 세계 시청자 반응을 담은 유튜브 중에는 주인공에 감정이입해 눈물 짓는 사람이 많다. 도대체 케데헌을 보고 왜 성인들은 울까?
그 해답을 찾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낙산공원까지 성곽길을 걸었다. 흥인지문에서 한양도성으로 오르는 길, 솜털이 보송보송한 수크렁이 바람에 흔들린다. 성곽길 이화마을의 전망 좋은 카페도 특수를 누린다. 프랑스에서 온 뱅상 씨(27·엔지니어)는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을 바라보며 자연과 함께 걷는 성곽길은 다른 해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울만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루미는 ‘테이크다운’에서 사자보이즈로 분장한 악령에 대해 ‘추악한 껍데기에 갇힌 무너진 영혼’ ‘감정 없는 악마’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루미는 성곽길을 걸으며 진우의 깊은 상처와 아픈 기억을 듣는다. 악령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가 최후의 대결을 펼치는 남산에서 ‘테이크다운’을 부르다 루미는 수만 관중 앞에서 자신이 헌터이면서도 악마 문양을 가진 괴생명체라는 사실이 폭로된다. ‘산산이 부수어 버리겠다’는 노랫말의 화살이 거꾸로 자신에게 돌아왔다. 인생 절정의 무대에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루미는 마지막 노래 ‘What It Sounds Like’에서 ‘나는 수백만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고 다시 돌아갈 수 없어’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때 뜻밖의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제는 깨진 유리조각에서도 아름다움을 봐. 상처는 내 일부야.’ 부서진 유리조각이 반짝반짝 빛나며 아름다울 때가 있다. 크리스털이나 다이아몬드처럼. 어른이 된다는 건 많은 상처를 품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는 과정 아닌가. 그는 ‘우리는 영웅은 아니지만, 아직 살아남은 자들이야’라고 노래한다. 두려움과 상처에도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승리자다.
한양도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조선을 지켜 주지 못했듯, ‘황금(golden) 혼문’이 모든 악을 물리치고 평화로운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 불과했다. 희망은 혼문이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케데헌의 메시지다.
● ‘통(通)’의 상징, 푸른 호랑이
케데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는 까치호랑이 더피와 까치 ‘서씨’다. 호랑이는 조선 민화에서 신성시되면서도 친근하게 그려진다.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는 황호(黃虎)였고,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은 백호(白虎)였다. 더피는 푸른색 청호(靑虎)다. 청색은 방위로 따져 동쪽. ‘해뜨는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 한류의 기세에 올라 탄 호랑이다.
더피는 진우의 반려 동물. 진우와 루미를 오가며 ‘만날래?’ 같은 소식을 전한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선과 악,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두 세계를 통(通)하게 하는 메신저 같은 존재다.
까치호랑이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기념품이기도 하다. 토요일이던 20일, 개장 30분 전인 오전 9시반부터 중앙박물관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문이 열리자 일부 관광객은 인기 ‘뮷즈(뮤지엄+굿즈)’를 사러 기념품 매장으로 뛰엇다. 올 상반기(1∼6월) 중앙박물관 뮷즈 매출은 지난해보다 34% 증가해 역대 최대 115억 원에 이르렀다. 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올 1∼8월 관람객은 432만8979명. 지난해 같은 기간 243만9237명보다 무려 77.5% 늘었다. 이 추세라면 올해 500만 명을 넘게 돼 세계 박물관 관람객 순위 톱 5에 들 수 있다.
미국 CNN 방송은 최근 미국 어린이 사이에서 케데헌을 50∼100번 시쳥하는 현상을 보도했다. 처음엔 자녀가 보던 케데헌을 엄마아빠도 함께 보며 골든을 부르고 소다팝 춤을 춘다. 전문가들은 케데헌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20∼30년 후 이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까지 문화적 지배력을 확대할 것으로 전망한다. 프랑스 서부 최대 일간지 ‘웨스트 프랑스’는 “한류는 파도나 물결을 넘어 세계를 뒤덮는 거대한 문화 쓰나미”라고 표현했다.
글·사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가볼 만한 곳 |
| 서울 종로구 관철동 청계천 변 서울컬쳐라운지는 외국인 관광객이 다양한 한류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캘리그라피, K-뷰티, 민화, 자개공계, K팝 댄스, 민화-낙산공원 그리기 같은 프로그램이 요일마다 펼쳐진다. 서울관광재단 이수택 관광사업본부장은 “한국 문화를 즐기는 체험형 관광이 최신 트렌드”라며 “더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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