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관광객은 왜 신용카드로 지하철·버스 못 타나요?
“아니, 누가 요즘 현금을 들고 다녀?”
24일 오전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배낭을 멘 덴마크 관광객 2명이 교통카드 충전기 앞에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지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현금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선 버럭 짜증을 냈다.

미국 관광객 태비 조지(25)씨는 “뉴욕에선 외국인도 평소 쓰던 신용카드를 찍고 바로 지하철을 탄다”며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세계 최고라고 들었는데 의외다”라고 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600만명. 명동, 홍대 등 거리는 늘 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한국이 다 좋은데 지하철·버스 타는 게 제일 불편하다”는 말이 나온다.
이들이 꼽는 문제는 지하철 시설이 아니라 결제 시스템이다.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싱가포르, 중국 베이징 등에선 어느 나라 사람이든 자기가 쓰던 신용카드를 찍고 지하철을 탈 수 있다. 별도로 지하철 표를 끊거나 교통카드를 살 필요가 없다. 런던에서는 2012년부터 신용카드로 지하철, 버스 등을 탈 수 있다. 원래 티켓을 끊어야 했던 뉴욕도 2019년 시스템을 바꿨다.
한국에선 아직 외국인 관광객이 신용카드를 찍고 지하철을 탈 수 없다. 내국인들이 쓰는 신용카드에는 교통카드 기능을 하는 ‘RF칩’이 들어 있기 때문에 찍고 탈 수 있지만, 외국인 관광객이 갖고 있는 해외 신용카드는 비자(VISA) 마크가 찍혀 있어도 먹통이 된다. 쇼핑을 하거나 식사할 때는 지장이 없는데 대중교통만 그렇다.
외국인 관광객이 국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편의점에서 티머니 등 교통카드를 사거나 지하철을 탈 때마다 현금을 내고 표를 끊어야 한다. 티머니 교통카드는 해외 신용카드로 살 수 있지만 충전은 현금으로만 가능하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시민들도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회사원 양모(41)씨는 “요즘 지하철·버스를 현금 내고 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외국인만 불편을 겪는 줄 몰랐다”고 했다.
한국은 2004년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을 만들면서 티머니 등 교통카드를 기준으로 결제망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해외 신용카드는 호환이 안 된다. 이런 시스템을 ‘클로즈드 루프(closed loop)’라고도 부른다.
이를 해외 신용카드도 사용 가능한 ‘오픈 루프(open loop)’ 시스템으로 바꾸려면 돈이 든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결제 단말기를 전부 교체해야 하는데 1대당 500만원 정도 들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서울 지하철 1~8호선 개찰구는 약 7000개로 공사비 등을 더하면 서울 지하철의 결제 시스템을 바꾸는 데만 약 500억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 시내버스 7000여 대와 마을버스, 택시까지 합치면 비용은 크게 불어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곳곳이 환승 시스템으로 연결돼 있어 전체 시스템을 바꿔야 환승 할인도 유지할 수 있다. 교통 당국 관계자는 “서울만 바꿀 경우 지하철을 타고 분당에서 내리면 결제가 안 돼 이중으로 돈을 내야 할 수 있다”고 했다. 서울 지하철도 서울교통공사가 운영하는 구간과 코레일이 운영하는 구간이 섞여 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도 소극적이다. 서울교통공사는 올 초 국무조정실, 국토교통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결제 시스템을 바꾸자고 건의했다고 한다. 교통공사 관계자는 “정부도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어느 부처도 나서는 곳이 없었다”고 했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티머니도 소극적이다. 강경우 한양대 교통물류공학과 명예교수는 “전 국민이 20년 넘게 티머니 등 교통카드를 쓰고 있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민원이 거의 없는 점도 원인”이라고 했다. 업계 관계자는 “비자 등 카드사의 수수료가 티머니보다 비싸 시스템을 바꾸면 지하철 요금이 인상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세계 주요 도시들이 이미 관광객들의 편의를 높이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며 “정부가 나서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김남조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최근 K팝, K푸드 등이 인기를 끌며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 몰리고 있다”며 “이런 바람을 이어가기 위한 인프라 투자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제주도는 지난달 전국 최초로 시내버스 결제 시스템을 바꿨다. 제주 시내버스는 해외 신용카드를 찍고 탈 수 있다. 제주도 관계자는 “시내버스를 타고 자유여행을 하는 외국인이 늘고 있어 시내버스 800여 대에 새 단말기를 추가 설치했다”고 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지하철망이 복잡한 일본도 2021년부터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며 “우리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부터 단계적으로 시스템을 바꾸면 된다”고 했다. 고준호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20년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우리나라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이제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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