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평범한데 특별한 의자

서정민 2025. 9. 27.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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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문화에디터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등을 쓴 한국 근대문학 대표 작가 횡보 염상섭 선생의 동상이 있다. 여느 동상처럼 근엄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선생이 나무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벤치 한쪽을 비워서 누구라도 잠시 앉아 쉴 수 있다. 재밌는 건 누가 앉더라도 그 풍경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는 점이다. 꼬마 아이가 앉으면 할아버지 작가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고, 20~30대 양복쟁이 젊은이가 앉으면 어른에게 위로받는 장면이 연상 된다. 중년의 아저씨가 앉으면 친구 같고, 흰머리 할머니가 앉으면 노래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 “당대의 미학과 기술 응축한 의자”
오프라인 경험 전략 도구로 역할

사실 의자는 매우 상반된 기능을 가진 가구다. 휴식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일터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도구다. 디자인도 상반된 양상으로 발전해왔다. 인간의 육중한 몸을 떠받치고 있어야 하기에 철저히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돼야 하지만 어떤 의자들은 공간을 꾸미고 눈을 즐겁게 하는 장식성을 우선으로 디자인된다.

아무튼, 의자는 ‘앉을 수 있는 도구’ 이상으로 시대의 라이프스타일·건축·인테리어·디자인·예술 등을 반영하면서 진보해왔다. 『의자의 재발견』 저자는 “의자는 타임캡슐처럼 당대의 미학과 기술을 응축해 보여준다”고 했다.

이제 의자는 오프라인 공간 경험을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한 번 더 진화하고 있는 듯하다. 공간을 찾은 소비자들이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을 특별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인데, 이를 위해선 의자의 생김도 물론 중요하지만 적절한 공간 배치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곳에도 있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도 있는 의자를 생각해보자.

국립중앙박물관은 2024년 1월 기증관을 재개관하면서 전시 공간 안에 소파 세트와 테이블을 구비했다. 안목 높은 재벌 회장의 서재에 초대받은 것처럼 전시를 보다가, 소파에 기대 휴식을 취하다가, 때로는 ‘햇빛멍’도 가능하다. 이현주 전 홍보관은 “박물관은 유물만 보는 장소가 아니라 휴식도 즐길 수 있는 장소라는 인식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했다.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1층의 중정 공간에는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이 조성한 정원이 있다. 이 정원을 사방으로 둘러싼 유리벽 안쪽에는 나무 벤치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관람객은 여기 앉아 수족관을 바라보듯, 작은 정원의 사계절을 감상할 수 있다.

중요한 전시 작품 앞에 의자를 놓는 것도 유행이다. 지난해 3월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진행된 사진작가 구본창의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에선 반원의 벽을 따라 달항아리 사진 12장을 건 ‘문 라이징 Ⅲ’ 시리즈(2004~2006년)를 선보이면서 바로 앞에 벤치를 둬 천체를 가로지르는 밤하늘과 달을 보는 듯한 경험을 유도했다. 국립춘천박물관은 브랜드 문화유산인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상설 전시장 중 한 곳에 1인용 의자를 두고 나한상과 독대할 수 있도록 했다. 벌써 1년 전 관람한 전시들인데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건 평범한 의자 배치 하나가 유도한 특별한 경험 때문이다.

물론, 거꾸로 가는 곳도 있다. 좋은 경험은 둘째 치고, 요즘 한창 리뉴얼 중인 유명 백화점은 각층 화장실 입구에 있던 3인용 소파를 모두 없앴다. 서서 지인을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은 다들 지쳐 보였다. 마케팅 전략 중 ‘백화점에 없는 3가지’라는 게 있다. 창문, 시계, 1층 화장실이다. 쇼핑 시간을 늘리고, 고객의 체류 동선을 유도하기 위한 것인데 알고 보면 한국의 백화점에는 의자도 없다(있어도 극히 적다). 쇼핑도 쉬어가며 해야 오래 할 마음도 기운도 생긴다. 잠시 엉덩이 붙일 의자 하나 없다면 쇼핑이고 뭐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물건은 온라인으로 사면 되니까. 백화점의 공간 경험 전략은 왜 거꾸로 가고 있을까.

서정민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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