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한 채에 담긴 건 ‘천’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아기 이불’, 세계로 번지는 연대의 바느질

제주방송 김지훈 2025. 9. 2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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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채 기증 이어, 올해 6월 조각보·9월 겉보 연결
신소연의 15년 바늘땀의 서사… K컬처로 확장되는 순간
바늘땀이 모여 완성된 ‘아기 이불’. 조각보로 이어진 천이 전시장에 걸려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불은 천이 아니라 마음을 덮는 거죠.”

26일, 제주시 예술공간 ‘이아’.
하얀 패널로 둘러싸인 전시장은 고요했지만, 바늘이 오르내릴 때마다 가라앉은 공기마저 맥박인듯 흔들립니다.

색과 질감이 제각각인 천 조각이 한 땀씩 이어질수록, 이곳은 흩어진 마음과 기억이 다시 묶이는 현장으로 변했습니다.

벽면에는 작은 쪽지가 빼곡히 붙어 있었습니다.
“아이야, 따뜻한 꿈 꾸길.”
“너의 내일이 환하길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밤을 자렴.”

짧은 문장마다 익명의 온기가 묻어 있고,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이불로 마음을 덮었습니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메운 손글씨 쪽지. 익명의 메시지가 또 하나의 이불이 되어 마음을 덮는다.


■ 제주 땅에서 찾은 답, 바늘 한 땀

치유공예 그룹 ‘손의 기억’을 이끄는 신소연 대표는 제주 이주 15년 차입니다.
섬은 자신에게 치유였지만, 동시에 물음을 던졌습니다.
“내가 이 땅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치유공예 그룹 ‘손의 기억’의 신소연 대표와 연구진이 전시장 ‘아기 이불 짓기’ 공간에서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붙잡은 답은 바늘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덮어주던 이불의 기억, 아이가 세상과 처음 만나는 천의 온기를 떠올리며 바느질을 공동체의 언어로 확장했습니다.

신 대표는 “바느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오래된 기술이다. 바늘이 오르내리는 동안 마음이 맑아지고, 그 마음이 모이면 결국 사회를 덮는 힘이 된다”라고 밝혔습니다.

■ 지난해의 이불, 올해의 조각보

‘아기 이불’ 프로젝트는 매해 한 땀씩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160여 명이 참여해 8채의 아기 이불을 완성해 제주의 미혼모센터에 전달했습니다.

다양한 조각보가 모여 완성된 아기 이불. 전시 후 미혼모센터에 기증된다. (‘손의 기억’ 제공)


이불을 받은 엄마는 아이를 눕히며 “우리 애도 왕자님 같다”라고 웃었고, 신 대표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작은 바늘땀이 곧바로 삶을 바꾸는 장면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올해는 그 과정을 한층 더 확장했습니다.
지난 6월, 179명이 함께 모여 조각보를 만들었고 이번달 그 조각보를 겉보로 연결해 10채의 아기 이불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이불은 11월 전통 장인의 솜과 천으로 마무리해 제주의 미혼모센터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자들이 조각천을 꿰매며 아기 이불을 완성해가는 모습. 작은 바늘땀이 곧 마음의 연결이 된다.


참가자들은 “아이에게 전해진다고 하니까 평소 하던 바느질인데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며, “한 땀 한 땀 더 신경이 쓰이고, 내 마음까지 이어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땀 한 땀 이어지는 조각천. 일상의 바느질을 넘어, 서로의 마음을 모으는 행위가 된다.


■ 미혼모를 넘어, 돌봄의 현장으로

‘아기 이불’은 분명한 출발선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삶의 여러 자리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신 대표와 ‘손의 기억’은 어르신들을 위한 방석, 장애인과 함께하는 바느질 등 다양한 현장에서 연대를 실천해왔습니다.

“누구나 살아온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어르신과는 그 시간을 존중하며 작업했고, 장애인과는 자기결정권을 지켜내는 방식으로 함께했다”는 신 대표는, “중요한 건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아기 이불’은 특정 집단을 넘어 사회적 약자를 품는 예술적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성된 아기 이불 겉보. 전시장에 걸린 조각보는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 오래된 기술, 오늘의 언어

바느질은 오랫동안 여성의 손끝에서 이어져온 생활 예술이었습니다. 혼례 이불, 아이의 옷, 집안의 덮개는 모두 축복을 기원하는 행위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페넬로페의 직조(Penelope’s Web)’가 끝나지 않는 기다림과 저항을 상징했듯 바늘은 언제나 시간과 관계, 그리고 기억을 잇는 도구였습니다.

제주의 ‘아기 이불’은 이 오래된 행위를 오늘의 공동체 예술로 되살리고 있습니다.

장식에서 돌봄으로, 기능에서 연대로.
바늘땀은 흩어진 마음을 다시 잇는 언어가 되고 있습니다.

■ 세계로 뻗어가는 바늘땀

오는 11월 국내 다른 지역에서 ‘아기 이불’을 소개하는 전시와 워크숍이 예정돼 있으며, 동시에 해외 전시를 위한 ‘이불 키트’ 준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는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지원과 ‘손의 기억’ 연구진의 꾸준한 동행이 힘이 됐습니다.
작은 바늘땀이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색색의 천 조각을 한 땀씩 잇는 손길. 작은 바늘땀은 모여 따뜻한 이불이 된다.


■ 제도적 과제와 지속의 길

이번 프로젝트는 ‘손의 기억’이 주관하고 제주문화예술재단이 지원해 진행되고 있습니다.
재단은 제작비 일부와 홍보를 맡아 지역 예술이 공동체 속으로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현장에서는 이 경험을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돌봄 현장으로 확산하기 위해, 교육·복지·문화를 아우르는 상설 연계 체계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기반이 마련될 때 ‘아기 이불’은 지속 가능한 사회적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으며, 제주의 작은 바늘땀은 전국을 넘어 세계로 확장될 것이라는 기대가 모이고 있습니다.

무수한 천 조각은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결국 하나의 이불로 완성된다.


■ 바늘땀이 그리는 연대의 미래

신 대표는 “언젠가는 모두가 참여해 ‘설문대할망의 치마폭’을 꿰매듯, 거대한 연대의 이불을 함께 짓고 싶다”라고 전했습니다.

제주의 신화가 전하듯, 작은 천 조각들이 모여 공동체를 엮는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 힘은 미혼모와 아이들을 넘어 어르신과 장애인, 다른 지역과 세대, 더 멀리 세계의 공동체까지 닿으려 합니다.

작은 바늘땀은 지금 돌봄의 언어이자 연대의 서사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제주의 바늘이 짜는 이 서사는 이제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와 세계를 향해 천천히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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