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찍었을까?”…‘사진가들의 사진가’ 로저 발렌 작품 대구서 만난다
현실기록 넘어선 사진의 새로운 예술적 경지
11월2일까지 대구 수성아트피아 1·2전시실

대구 수성아트피아 전시실은 사진예술의 강렬한 이미지와 이를 감상하려는 관람객들의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전시장 입구, 기괴하게 뒤틀린 피사체와 거친 질감의 벽면 앞에서 관람객들은 숨죽인 채 작품을 응시하고 있다. 뒤이어 작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터져나온 것이다. 말이 없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찍었는가', '무슨 의미인가' 등에 대한 소리 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관람객들을 혼란에 빠뜨린 이는 동시대 사진예술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세계적 거장 로저 발렌(Roger Ballen, 1950~)이다.
수성아트피아는 오는 11월2일까지 '사진가들의 사진가'로 불리는 세계적 거장 로저 발렌의 대규모 개인전 'MIND SCAPE(마인드 스케이프)'를 연다.
◆ 로저 발렌의 발자취 아우르는 전시

이번 전시는 로저 발렌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조망하는 자리다. 특히 1980년대 초 미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한 로저 발렌이 요하네스버그에서 마주한 인물과 공간을 기록하며 자신만의 미학적 스타일인 '발레니스크(Ballenesque)'를 만들어낸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프리카의 소외된 이들을 찍으면서도 그들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인간 본연의 '심리적 풍경(MIND SCAPE)'의 주인공으로 세웠다. △환영들의 무대(2005~2006) △새들의 수용소(2008~2013) △로저, 혼돈의 쥐(2015~2020) △영혼의 무대(2016~)까지 총 4개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로저 발렌의 작품은 작가가 직접 대상을 연출하고 관계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는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40년 이상 지속해왔다. 그 결과, '발렌스러운'이라는 의미의 '발레니스크'라는 새로운 예술 용어가 탄생했다. 이 용어는 단순히 그의 작업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 사진의 전통적인 역할인 현실 기록을 넘어선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의미한다.
로저 발렌의 독특한 예술 세계는 그의 이력도 한몫 했다. 그는 UC버클리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전 세계를 여행하며 3세계 국가 사람들의 삶을 기록했다. 이후 두 번째 전공으로 지질학을 선택해 아프리카에서 광물 관련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러한 심리·지질학에 대한 이해는 그의 작품에 깊이와 독창성을 더했다.
이번 전시를 큐레이션한 석재현 예술감독은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가 그의 작품 전반에 녹아 있다. 이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의 깊은 교감, 그리고 그들의 삶을 현실적이지만 때로는 초현실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 단순한 피사체 아닌 인간 내면 표현

사진 속 인물들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그들의 내면과 심리가 투영된 존재로 재탄생한다. 낡은 벽과 낙서, 폐허, 동물 사체, 가면과 인형 등 비현실적 요소들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뒤엉키며 견고하면서도 불안정한 분위기를 동시에 조성하는 데, 이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미학적 요소로 작용한다.
평생 흑백 필름으로 작업해 온 발렌은 2017년 디지털카메라를 통해 컬러를 접하게 됐다. 그의 컬러 작품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현실의 색감에 환상적인 요소를 더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표현하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는다. 예를 들어, 흑백 작품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관람객의 감각을 자극하며, 작품 속 초현실적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전시장을 찾은 김주은씨(31·대구시 수성구 범물동)는 "기존에 봤던 사진 전시 중 가장 강렬하고 독특한 전시"라며 "끝을 모르는 상상력에 웃음이 나기도 하고, 놀랍고 기이하기도 하다. 사진의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한편 10월16·23일에는 예술평론가, 사진가, 교수 등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여는 테이블 토크 'ART SALON: 발렌을 말하다'가 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린다. 특히 이번 전시는 2025 대구사진비엔날레(9월18~11월16일)와 비슷한 시기에 열려 전국 사진 애호가들의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