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장교 재벌 3·4세’와 ‘군악병 의사’···무너지는 ‘국군 병력 수급’[박성진의 국방 B컷](41)
2025. 9. 26. 15:06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자원 모집이 ‘혼돈의 문’에 들어섰다. 해군은 수병(병사)이 모자라 간부만 승선하는 함정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반면 공군 병사는 ‘지원자 풍년’이다. 의대생들마저 군의관 대신 공군 병사로 지원하는 사례가 급증하면서 의대 출신 지게차 운전병과 군악병도 등장했다. 지게차 운전병은 의사 가운 대신 3t급 지게차를 다루며 물자 운반과 정비 업무를 하고 있다.
육군에서는 기계화부대 훈련에 참여한 K-21 장갑차의 포수와 조종수가 부족해 옆 부대에서 빌려오는 ‘병력 품앗이’까지 벌어지고 있다. 소총수가 모자라는 이유로 보병 전개 훈련의 일종인 하차 전투 훈련을 포기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육·해·공군 모두 부사관 퇴직이 늘면서 그 빈자리를 신규 인력이 채우지 못해 아우성이다. 국방부 자료를 보면 필요 간부 충원율이 2019년 94.1%에서 2024년 64.9%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사관 경우 같은 기간 93.5%에서 51.2%로 급락했다. 다급해진 육군은 부사관 지원 문턱을 낮춰 병사로 입대 2개월만 넘으면 부사관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징집의 균형’이 깨진 후폭풍이다. 그동안 한국군은 징병제를 군 간부 충원의 손쉬운 수단으로 연계해 인력을 수급해왔다. 한국군은 병역의무자가 병사로 갈지, 간부로 갈지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교와 부사관이 되면 병역의무를 해결함과 동시에 평생 직업을 가질 수도 있다. 이 같은 시스템은 장교와 부사관의 복무 여건이 병사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봉급 급등과 군 복무 기간 단축과 같은 병사들에게 유리한 개선책이 잇따라 나오면서 1953년 정전협정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해왔던 한국군 병력 수급 시스템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군의관 싫어” 의사·의대생들
해군은 함정 근무 시 스마트폰 사용이 제한되고 배를 타는 일 자체가 힘들 것 같다는 선입견으로 수병(병사) 자원 확보가 쉽지 않다. 해군은 수병 지원율이 급감하자 간부만 승선하는 함정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구축함과 호위함 등 대형함에는 조리병 등 소수 병사만 배에 태우고, 소해함과 경비정 등 소형 함정은 병사 없이 운항하는 방식이다. 해군은 함정 12척을 ‘간부화 시범함’으로 하면서 2030년까지는 함정 간부화 조치를 모든 함정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다. 해군은 또 수병의 함정 의무 근무를 6개월에서 4개월로 줄이고, 수당과 휴가를 늘리는 등 수병 지원율을 높이려는 ‘당근책’을 내놓고 있다.
공군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공군 병사 입대 경쟁률은 10 대 1을 넘어섰다. 공군 복무 기간은 21개월로 육군(18개월), 해군(20개월)보다 길지만, 격오지 근무가 거의 없고 200만원이 넘는 병장 월급을 몇 개월 더 받을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과대학 졸업 후 의사 면허를 딴 뒤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대신 공군 병사로 입대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정부와 의사들의 의·정 갈등 여파로 의대생들이 짧은 기간에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 현역병으로 입대하는 현상이 의·정 갈등 해소 국면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4월 65명이던 의대생 현역 입대자 수는 1년 만인 올해 4월 589명으로 9배 이상 늘었다는 게 공군의 설명이다. 지금도 의대생 현역 입대자는 월 400~500명대 수준이다. 공군 병사 생활이 힘들지 않고, 복무 기간이 군의관보다 짧아 현실적으로 이득이 많다는 계산에서 나온 의대생과 졸업생들의 선택이다. 3수, 4수까지 해 입대한 의대생도 드물지 않다.

공군 군악대에는 의대를 졸업해 의사 면허증을 가진 병사도 있다. 공군 군악대에는 관악기 전공자가 모자라는 틈새를 노려 지원한 것 같다는 게 공군 관계자의 설명이다. 의사가 취미로 하던 관악기 연주를 입대에 활용한 사례다.
공군 입대에 실패해 육군 병사로 방향을 튼 의대 졸업생도 상당수다. 농어촌 지역에서 3년 넘게 일해야 하는 공보의(공중보건의)보다 짧게 18개월만 근무하는 육군 병사가 낫다는 판단에서다. 전역 후에는 ‘절약’한 군 복무 기간만큼 의사로서 훨씬 많은 고소득을 챙길 수 있다. 대신 공보의와 군의관 인력은 갈수록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공보의는 물론 군의관조차 2029년부터는 부족해질 것으로 국방부는 추정했다.
재벌 3·4세는 “왜”
전 세계적으로 해군 장교는 귀족이나 상류층이 많이 간다. 유럽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스웨덴 발렌베리그룹의 창업주 가문인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들이 해군 장교로 복무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창업자 앙드레 오스카르 발렌베리를 필두로 5대에 걸쳐 170년에 이르는 동안 이 전통은 지켜지고 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배우자인 필립 공도 영국 해군 장교 출신이고, 그의 아들인 찰스 3세 역시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도 미 해군 장교로 임관해 어뢰정 정장으로 복무했다.
국내에서도 재벌가 자제들이 해군 장교를 선택해 눈길을 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둘째 딸 민정씨는 2014년 11월 117기 해군사관후보생(OCS)으로 자원입대했다. 100여 년 전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의 도전정신과 리더십에 감동해 해군을 지원했다고 했던 최씨는 아덴만 파병부대인 청해부대와 해군 2함대 사령부 예하 전투전대 통신관으로 근무했다.
지난 9월 15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 지호씨가 139기 해군 학사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그는 11주간 교육 훈련을 거쳐 12월 1일 해군 소위로 임관해 총 39개월의 군 생활을 할 예정이다.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은 참모총장 재직시절 우수 인력을 해군으로 끌어오기 위해 고시 출신이 사관후보생으로 해군에 입대하면 서울 근무를 보장해준다는 조건을 내걸어 ‘재미’를 보기도 했다. 장교의 길을 선택하는 재벌가 자제는 이례적 사례다.
과거 한국군은 병력을 뽑는 데 충분한 인구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아온 집단이다. 하지만 현재처럼 18개월 복무하는 병사 집단 30만명을 유지하려면 매년 20만명을 안정적으로 징집해야 하지만, 과거와 같은 인력 수급 혜택이 군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어 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은 인구 감소 충격으로 한정된 인구를 대상으로 군과 사회가 경쟁하는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다. 여기에 징집 대상 세대는 ‘장교의 명예’보다 ‘병사의 실리’를 택하는 분위기다. 나아가 징집 대상자들은 육·해·공군을 비교해 ‘워라밸’까지 따져 각 군끼리 병사 수급 경쟁을 벌여야 하는 형편이다. 한국군 병력 수급 구조가 모병제로 가는 과도기를 겪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박성진 ‘안보22’ 대표·전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 anbo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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