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DA부터 법원까지 “못 믿겠다”... 정치화 덫에 걸린 美 연방기관, 신뢰도 ‘와르르’

유진우 기자 2025. 9. 2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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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를 지탱해 온 연방정부 기관들에 대한 미국인들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식품과 의약품 안전을 책임지는 식품의약국(FDA)부터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는 사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은 정부 시스템 전반에 걸쳐 불신을 쏟아냈다. 전문가들은 기관의 정치화가 낳은 불신이 미국의 근간을 위협하는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경고했다.

미국 메릴랜드주 화이트 오크에 있는 식품의약국(FDA) 본부. /연합뉴스

25일(현지시각) 펜실베이니아대 애넌버그 공공정책센터(APPC)가 지난달까지 집계해 이달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대한 신뢰도는 1년 전 72%에서 64%로 8%포인트 하락했다. FDA 신뢰도는 73%에서 63%로 10%포인트, 국립보건원(NIH)은 74%에서 62%로 12%포인트 급락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CDC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1년 전 28%에서 36%로 늘었다. FDA를 믿지 않는다는 응답은 27%에서 37%로 , NIH 불신 응답은 26%에서 38%로 뛰었다.

애넌버그 공공정책센터는 보건의료 기관들이 더 이상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정권 입맛에 따라 흔들리는 ‘폴리사이언스(Poliscience·정치+과학)’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대중 인식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풀이했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 백신 회의론자로 알려진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이 제공하는 공중 보건 정보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39%에 그쳤다. 60%는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반면 팬데믹 기간 동안 비판에 휩싸였던 앤서니 파우치 전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57%로 케네디 장관보다 18%포인트나 높았다. 케네디 장관은 과거 CDC를 ‘부패의 온상’이라 비판했다. 장관 취임 직후에는 CDC 자문위원 17명 전원을 해임해 논란을 일으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9월 22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발표를 하는 동안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식품 안전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심각했다. 국제식품정보협의회(IFIC) 최근 조사에서 미국 식품 공급 시스템의 안전성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55%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응답자 10명 중 4명(43%)은 ‘너무 잦은 리콜’을 믿지 못하는 이유로 꼽았다.

미국인들은 식품 시스템 전체(55% 신뢰)보다 본인이 직접 구매하는 식음료(72% 신뢰)는 더 안전하다고 믿었다. 이는 시스템 자체는 믿지 못하지만, 개별 소비 활동에서는 안전을 확신하려는 심리적 단절을 보여준다고 IFIC는 전했다. 또한 응답자 46%는 식품 리콜 정보를 연방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봤다. 실제 리콜 정보를 정부로부터 정보를 얻었다는 응답은 6%에 불과했다. 대부분(63%)은 언론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신뢰 붕괴는 행정부를 넘어 사법부까지 확산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조사에서 미국 사법 시스템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35%에 그쳤다. 이는 4년 전인 2020년 59%에서 무려 24%포인트나 폭락한 수치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같은 급격한 신뢰도 하락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미얀마(-46%p),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베네수엘라(-35%p),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28%p) 등 심각한 정치적 격변을 겪은 국가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워싱턴 D.C. 법무부 건물 밖에서 경찰이 경계를 서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러시아, 이라크, 이란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평균(55%)과 비교하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도 미 연방대법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50%에 달해 30년 내 최악의 수준을 기록했다.

사법 불신의 핵심 원인으로는 ‘사법의 정치화’가 꼽힌다. 시카고대 톰 긴즈버그 교수는 NYT에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판결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여러 건의 기소 이후, 사법부가 돌이킬 수 없이 정치화됐다는 인식이 퍼져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과거 정치 성향에 따라 한쪽 진영 불만이 다른 쪽 진영 지지로 상쇄됐지만, 지금은 정치 성향에 상관없이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에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층의 사법부 신뢰도는 46%에서 29%로 하락했다. 민주당 지지층 신뢰도 역시 62%대에서 44%로 급락했다.

뉴욕시 유엔 근처에서 친시리아 활동가들이 집회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시스템 불신’은 미국 사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공중 보건 위기 상황에서 정부 발표를 믿지 않아 방역 체계가 무력화되거나, 법원 판결 권위가 흔들리면서 사회 혼란이 가중되는 식이다. 올해 미국에서는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백신 회의론과 맞물려 공중 보건 기관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면서, 25년 만에 최악의 홍역 감염 사태가 벌어지는 등 직접적인 피해가 나타나고 있다.

톰 긴즈버그 교수는 “대중의 신뢰가 낮을 때 사법부는 정면 공격에 취약해진다”고 경고했다.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갈등을 조정해야 할 국가 시스템이 불신의 대상이 되면서, 미국 민주주의 자체가 기로에 섰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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